글을 쓰면 내가 꽤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맨날 무채색 옷만 입고 터덜터덜 걷는 내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나는 버스 안에서도, 횡단보도를 기다리면서도 글을 썼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 없는 허무함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수능이 70일 정도 남았다. 요즘 학교에 가면 다들 입시 얘기뿐이고, 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몰래 글을 쓰고 있어도 나도 결국 고등학생이다. 실수하고 짜증 내는 애이다. 그런 나이에 수능이란, 태어나서 겪어 보는 것 중 가장 큰 이벤트이다. 하루 종일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 문제 하나에 내 미래가 변화하고, 그 하루를 위해 빼곡한 노력을 쌓아 가고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기도하게 되니,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큰 이벤트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1년이 너무 빠르다는데, 나는 작년보다 시간이 더 안 가는 것 같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먼 산을 바라볼 때처럼, 내 시간은 그 산처럼 흘렀다. 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갔고 모의고사 귀퉁이에 끄적이는 낙서만 쌓여갔다. 어른이 된다는 사실은 나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나인데, 이렇게나 미성숙한 나인데 어른이 되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충분히 자란 후에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성장을 유예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생각했다. 내가 어릴 적 꿈꿔왔던 열아홉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다정하고, 진지하고 총명한 고민을 하고, 나의 괴물과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어른을 나는 상상해 왔다. 잠이나 자고 싶고 연민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지금의 나와 그때 내 상상 속의 나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떨까. 타임머신을 타고 잔뜩 기대하면서 올 그 초등학생은 나를 보고 분명 풀이 죽을 것이다. 토라져서 내 얼굴을 쳐다볼 것이다. 수능에 대한 막연함은 이런 내 방황의 표상일 뿐이었다.
수능이 끝나면 다 괜찮아질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항상 이런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되면 알게 될 거야, 고등학생이 되면 어떻게든 될 거야, 고3이 되면 달라질 거야, 라며 미래를 기대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 기대의 결과를 떠올려 보건대, 수능이 끝난다고 다 괜찮아질 리는 없는 것 같다. 원했던 미래로 가면 나는 또 다음 미래를 원했다. 지금을 만끽하지 못했다. 성장은 유예할 수 없는데 행복만은 유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콕콕 찔렀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행복이란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려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미래에만 매여 살면 삶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일 것 같았다. 논리나 의의, 가치, 그런 것들을 넘어선 내 느낌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무엇을 하고 싶지, 하고 그럴싸한 질문부터 던져 보았다. 그러나 놀랍도록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수학 문제를 푸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답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 나름 일기도 쓰고 글도 많이 쓰는데, 열아홉 살이나 되었는데... 상당히 충격이었다.
몇 시간 뒤, 이런 내 상태를 인정하고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기억을 뒤지다가, 친구가 블로그에 올렸던 '100문 100답'을 생각해 냈다. 나는 100개의 질문 목록을 복사해 와서 노트북 메모 앱에 넣었다. 그리고 엔터키를 쳐서 내 답변을 적기 시작했다. 제일 좋아하는 색은?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버킷리스트는? 한결 답변하기 수월했다. 하얀색, 날씨의 아이, 생각 안 해봤어,라는 대답을 적었다. 계속해서 타이핑을 했고, 결국 100개의 답변을 완성했다. 기분이 묘했다.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내 취향, 모르고 있었던 내 성격, 예상외의 기억이 나에게 인사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며칠이 지나서 다시 그날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뭔가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날은 정말로 흔하지 않은 기억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나라는 존재의,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에 초점을 맞췄다는 건 무용하고 특별한 일 같았다. 마치 길가를 걸어가다 몸을 잔뜩 숙여 민들레를 본 기분이었다.
최근에 재밌게 읽은 소설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신의 이야기는 자신이 써야만 한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쓴 이 소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봄은 미완>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시부야는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신밖에 정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일단,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신밖에 정할 수 없다고.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중 '봄은 미완', 사사키 아이
서술자인 아오야마는 아카사카의 제안으로 '시티 걸즈'를 결성하고, 아카사카가 좋아하는 마쓰도 선배와 그 선배가 쓴 소설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아오야마는 마쓰도 선배를 좋아하게 되고, 친구 사오리와 함께 있다가 마쓰도 선배를 발견해 그를 부르지만 그는 마쓰도 선배가 아니었다. 아카사카가 전에 마쓰도 선배라며 몰래 바라봤던 사람이었는데. 아오야마는 혼자 학교로 달려가 문예부 담당 선생님께 마쓰도 선배에 대해 묻지만, 그런 학생은 없었다는 대답만 되돌아온다. 아오야마는 문예부실에 있는 글들을 뒤지던 중 1988년에 쓰인 '봄은 미완'이라는 소설을 발견한다. 그 소설 속에는 아카사카와 시부야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아카사카에 관한 모든 것과 소설 속 사건은 정확히 일치한다. 아오야마는 아카사카에게 '시부야'일 뿐이었다. 아오야마는 자신이 소설 속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아카사카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은 아오야마가 그 사실을 깨닫고 나오는 서술이자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흥미진진한 전개를 곱씹어보고 있는데, 불현듯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나는 누구의 소설 속에 있지? 나는 누군가의 도구로 살고 있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친구와 함께 써 내려가는 연작소설인지도 모르고, 누군가와 서로 부품 관계인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조금씩 빌려 와서 만든 내 소설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진짜로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소설이 아니었다. 나는 소설을 읽는 사람은 될 수 있지만 소설은 될 수 없었다. 이런 즉흥적인 움직임을, 심장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나는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 내 감정은 글로 담기에는 너무나도 생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삶은 소설이 아니었다.
이 '봄은 미완'이라는 소설에서 나는 의외로 위안을 얻었다. 행복을 잡으려고 하니 오히려 그것에 매여 있었던 것 같다. 행복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려고 했다. 그래도 나름 노력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제법 대견했다. 물론 그 목표에만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절망과 두려움과 환희를 가리지 않고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을 고민할 때 나의 내면과 이어져 있다고 느낀 그 기분을 기억할 것이다.
나도 그냥, 생각하기로 했다. 고등학생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질 일 년 후의 나에 대해서, 내일 할 수행평가에 대해서, 편의점에서 사 먹을 음료수 맛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나로부터 멀리 있고 모르는 것투성이다. 밝은 말을 쓸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나를, 나의 지금을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풍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