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2년 뒤인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그의 책을 대략 스무 권은 읽은 것 같다. 그의 책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책 소개를 일일이 읽어 보고 사다가, 하루키 소설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를 간파한 뒤로는 제목이 끌리는 책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사놓고 심심할 때 조금씩 읽으며, <1Q84>는 겨울방학 때 큰맘 먹고 단숨에 읽었다. <해변의 카프카>는 눈을 가린 손바닥 너머로 영화를 보는 심정으로 읽었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수행평가에도 썼으며, <밤의 거미원숭이>는 언제나 읽었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중국행 슬로보트>처럼 여러 번 읽은 책도 있으니, 그동안 읽은 하루키의 텍스트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처음 하루키를 읽은 건 책 표지 때문이었다. 지금은 잘 안(못) 가지만, 중학생 나에게 가장 설레는 일은 시내 교보문고에 가는 것이었다. 딱 한 번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 보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는데, 우리 지방에 있는 시내 교보문고는 그 정도로 넓지는 않아도 아담하고 정다운 구석이 있다. 한 층이 좁은 대신 여러 층의 건물인데, 웹툰, 소설, 에세이, 시, 만화 등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가 거의 1층에 몰려 있어서 나는 항상 1층을 배회하곤 했다. 꽤 오래 돌아다녀도 손에 잡히는 책이 없으면 베스트셀러 코너로 갔다. 소설의 의미를 인기가 말해주진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품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그 사람들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호기심은 생기는 게 베스트셀러니까. 나는 거기서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했다. 민음사 버전이었고, 초록색과 빨간색이 발산하는 경계를 사이로 위아래에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금색 글씨로 쓰인 제목. 처음에는 '크리스마스 느낌이네'라고 생각해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안 사면 집에서 계속 생각날 것 같아, 하는 예감에 그 책 한 권을 샀다.
나는 그 책을 거의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마침 중학교 3학년 중간고사가 끝나서 학교에서는 자습시간이 많았고, 나는 친구의 아이패드로 함께 영화를 보다 친구가 잠들면 <노르웨이의 숲>을 펼쳤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나를 처음 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하루키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스타일은 우리나라 현대문학이나 영미권 고전만 읽어 왔던 나에게 처음 보는 글의 세계였다. 흔들리는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와타나베, 생동하는 미도리, 습기를 머금은 듯한 나오코. 책 속의 모든 이야기에 나는 잔뜩 밀착되었다. 여유롭게 감상하지도 못했고 나를 잊은 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한참 동안 멍했다.
사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그의 소설에 매료되었는지,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이 모호함은 후에 <아무튼, 하루키(이지수)>를 읽으면서 일부 해소되었는데,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내가 이걸 바꿨고, 내가 이렇게 변했어!"라고 피력하지 않잖아. 끝까지 거리를 두는 점이 읽는 사람을 편하게 해줘. 멋져 보이는 느낌은 거기서 생기는 것 같아. 메시지를 주입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주인공 '나'는 좋거나 싫은 것도 없지. 이런 과정 끝에 이렇게 됐다, 하고 산뜻하게 끝내잖아. 익숙한 구조에 신선하고 세련돼 보이는 이야기, 산뜻한 거리감. 근데 다 떠나서 처음 읽었을 때는 확실히 취향에 매료되었던 것 같아.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생각해 보면, 그때 나에게 확실한 것은 몇 없었다. 시험지의 답도 확신할 수 없었고 옆에서 영화를 보는 친구의 눈빛도 알 수 없었고 나의 삶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런 나와 세계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진로는 뭐니? 고등학교는 어디 갈 거니?'처럼 같이 중학교 3학년에게 날아오는 질문에도 답하기 어려웠다. 나처럼 대답을 못 해서 한숨 소리를 듣는 애가 있는가 하면 자신감에 가득 찬 대답을 해서 만류당하는 애도 있었다. 오지선다가 아닌 삶과 나 없이도 이미 잘 돌아가는 세계 사이의 거리는 열여섯 살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루키의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물론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느낌 때문에 오히려 하루키의 소설이 좋았던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이해한다고 믿으면 오히려 공허한 기분이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음,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듯 완벽한 이해도 존재하지 않는가 봐,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런 넉넉함이 나를 감싸 안은 것이다. 세상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고 그 속에서 이해한 척 애쓰는 것보다 그냥 ‘모르겠어, 그래도 읽을래’ 하는 편이 나는 더 좋았다. 뭐가 어떻게 좋은지는 몰라도, 아직 다 이름 붙이지 못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이 새로웠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위스키를 마시듯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그가 써 내려가는 '젊음'이, 그리고 '사랑 이야기'가 좋았다. 내가 여태껏 읽은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은 언제나 젊었고, 그중에는 어리다고 말할 수 있는 주인공도 있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점차 나이를 먹거나, 유년기와 성인인 현재가 교차하는 소설도 있었다. 이를테면 <해변의 카프카> 주인공인 다무라 카프카는 열다섯 살이고,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하지메(와 시마모토) 이야기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시작한다. 물론 하루키 소설 중 시공간이 순방향으로 쭉 흘러가는 소설이 잘 없긴 하지만, 처음부터 중장년인 채로 시작하는 주인공은 없었다. 모두 소년 혹은 청년일 때부터 시작했다. 나는 그 점에서 왠지 그에게 고마웠다. 하루키 본인은 청년기를 훌쩍 넘어 나이가 들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젊은 주인공을 쓰고 있고, 소년의 내면을 정확하게 포착하며 소년의 언어로 글을 쓰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어른들은 어떨지 몰라도, 하루키의 이러한 특징이 나에게는 반딧불이가 남기고 간 빛의 궤적 같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훨씬 더 자라서도 이때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내 나이는 보잘것없는 시기가 아니구나, 누군가는 이렇게 꾸준히 글로 써 줄 만큼, 꽤 괜찮은 시기구나. 이해받을 수 있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하루키는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지만, 또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도 않는다. 그 점이 안심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어른이 되어 많은 것을 잊을까 봐, 혹은 그것들이 먼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나도 저렇게 체념해 버리면 어떡하지? 지금을 잊으면 어떡하지, 믿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들을 하며 소중한 것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100퍼센트의 사랑을 좋아했다. 서툴게 지키려 했던 나의 소중한 것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소중하게 여기고, 평가하지는 않고 솔직한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에 몇 번이고 안도했다.
물론 100퍼센트의 사랑이나 영원함 같은 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나도 짧다면 짧지만 나름 밀도 있는 십구 년을 살았다. 그렇지만 아직 십구 년밖에 안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게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언어'로 썼을 때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간 관계에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과거의 언어와 내가 나이가 더 들어서 영원한 건 없어, 하고 냉소하는 미래의 언어 말고. 온갖 세상의 말과 흔들리는 '만약'의 난입 없이, 오직 눈을 감았을 때 마음의 울림으로 말하는 '지금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나에게 영원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100퍼센트는 있다. 지금의 언어는 미래도, 과거도 생각하지 않는다. 꿈처럼 지금만 있다.
나는 책을 나대로 읽는 타입이다. 그래서 거창한 해석은 못 하지만, 느낌이라면, 관련된 기억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물론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의 책은 내 마음속 안전지대이기 때문에, 그 안전지대를 오로지 책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작가 소개도 안 읽고 그의 책에 대해 검색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그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 신간이 나오면 없는 용돈을 끌어모아서, 저금통을 깨서라도 살 것이다. 그의 책만은 빌려 읽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는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면, 너무 두꺼워서 차마 다 읽지 못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처음부터 단숨에 읽을 것이다.
짧은 조각글.
내 마음속이 공간이라면, 그것은 분명 도서실일 것이다. 비어 있던 책장을 자라면서 여러 책들로 채웠다. 그 책들은 사라지기도 하고, 그 자리를 지키기도 하고, 같은 것이 여러 권 생기기도 했다. 나는 그 책을 수많은 나에게 빌려 주었다. 그래서 책들에는 때론 메모가 있기도 하고, 내가 완전히 삼켜 버려 그 페이지가 찢어져 있기도 하다. 다시 돌아오는 책, 두 배로 돌아오는 책, 돌아오지 않는 책,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새롭게 발견되는 책. 아주 가끔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책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서실 입구에서 기다리게 하고 신중하게 책을 골라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 봐, 하고. 그리고 그중에는 하루키의 책이 있다. 그의 책에서 내가 몇 번이고 돌아가 읽은 문장들이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내가 쏟아낸 감정의 흔적들도 있다. 그리고 그의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의 문체가 조금 스며든 나의 언어로 쓴 나의 일기장도 있다. 일기장에는 하루키의 책에 대한 감상이, 지금의 나와 내 주변 세계에 대한 생각들이 빼곡하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여지가 좋았다. 방황하는 주인공들이 좋았다. 나는 내가 계속 모르면 좋겠다. 앞으로도 확언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도 나의 지금을 무시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도저히 지금이 지금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내가 나라는 것도 어쩐지 딱 와닿지 않아. 그리고 여기가 여기라는 것도 말이야. 언제나 그래. 훨씬 뒤에 가서야 겨우 그게 연결되는 거야. 지난 10년 동안 줄곧 그랬어. -<양을 쫓는 모험>(상), 무라카미 하루키, 신태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