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풍경
고등학교의 기억이 언젠가 지금보다 훨씬 더 애틋해질 걸 안다. 애틋한 걸 넘어서 사랑스럽고, 그리워질 거라고 감히 예측해 본다. 지금은 단지 글자뿐인 이 감정들이 언젠가 고스란히 느껴질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졸업 후의 삶에 대해 다만 상상할 뿐이다.
현재진행형인, 어느 부분은 이미 지나가버린 나의 고등학교를 담아놓고 싶었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나의 추억, 느낌, 묘사까지 글에는 모두 담을 수 있으니까. 사진도 넣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2년 반의 시간 동안 찍어 놓은 사진이 죄다 초점이 나가고 나와 친구들이 잔뜩 나온 사진이라... 못 넣을 것 같다. 어쨌든 이 글이 당신의 열아홉을 데려와 주길, 데려와서 함께 산책할 수 있게 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거면 정말로 충분하다.
그럼 나의 고등학교 풍경, 시작합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다 보면 그때그때 필요한 게 생긴다. 샤프심이나 화이트부터 시작해서 담요, 물, 가위, 옷... 필요한 것들은 많다. 나처럼 준비성이 철저하지 못한 사람은 당장 내일 뭐가 필요할지 예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매번 곤란한 일이 생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어느 반을 가든 꼼꼼한 애들이 있다는 거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대부분 빌려준다. '아, 또 안 들고 왔네.'하고 푸념하는 소리를 듣고 먼저 빌려주겠다고 말하는 멋진 친구도 있다.
애들은 생각보다 많은 걸 갖고 있다. 물론 그 짐의 크기는 기껏 해봐야 사물함 정도지만, 얘한테서 이거, 쟤한테서 저거... 이런 식으로 빌려 쓰다 보면 많은 물건을 섭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친구는 사물함에 종이컵과 나무젓가락을 많이 갖고 있다. 학교에서 배달음식을 먹을 때면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빌린다.
물건을 공유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심리적인 장벽도 물론이고, 빌려 주고 돌려받는 불편함을 감수할 인내심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그런 게 자연스럽다. 그 대여와 반납의 범위는 상당히 발 넓을 수도 있고, 나처럼 친한 친구로 한정될 수도 있고, 아무튼 다양하다. 심지어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났다. 동아리 홍보 포스터를 붙여야 하는데, 어느 친구에게 물어봐도 테이프가 없어서 교무실에서 빌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출석부에 싸인하기 위해 볼펜이 있는 애를 찾으신 적도 있었다. 이런 일은 학교에선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식하기 힘들지만, 문득 한 발 멀어져 생각해 보면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어색함 같은 거, 여기서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넉넉한 머뭇거림만이 존재하는구나. 몽글몽글해지곤 했다.
물건을 빌렸으면 정성을 다해서 돌려줘야 한다. 특히 옷처럼 직접 닿는 것(난 옷은 진짜 진짜 친한 친구에게서만 빌릴 수 있다)은 꼭 먹을 것과 포스트잇에 쓴 메모를 포함해서 돌려준다. 그게 아니더라도, 돌려주면서 하는 '잘 썼어', '고마워', '땡큐', 이런 말들로 그다음 교시는 기분이 좋았다.
학교 하면 떠오르는 냄새는 여럿이다. 그 냄새들은 간격을 두고 심상처럼 떠오른다. 분필 냄새, 땀 냄새처럼 또렷이 기억나는 냄새도 있지만, 옅게 흩뿌려져 있어 이름 붙이지 못했던 냄새도 있다. 내겐 간식 냄새가 그렇다.
우리 학교는 매점이 없다. 대신 자판기는 있다. 학교 바로 앞에 편의점도 두 군데나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자판기로 뛰어 내려갔다가 뛰어 올라왔고, 등굣길이나 석식 시간이면 편의점으로 갔다. 학교 애들로 북적북적한 편의점으로 들어가, 사장님의 빠르고 정확한 계산이 끝나면 '2분 남았어!'라며 또 뛰었다.
일과 중에 교실에서 먹는 건 주로 작은 간식, 이를테면 사탕이나 젤리 같은 거다. 학교가 안 끝났으니 냄새가 풍기는 건 먹을 수 없고, 편의점 나들이도 불가능하니 등굣길에 챙겨 온 간식으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물론 급식도 먹는다. 하지만 급식이랑 간식은 별개다. 급식도 맛있지만, 간식도 참을 수 없다.
애들마다 사 오는 간식 종류가 있다. 나는 주로 초콜릿을, 어떤 친구는 작은 과자, 어떤 친구는 젤리를 매일 다른 종류로 사 온다. 평소에 많이 대화해 보지 않은 사이라도 간식은 나눠먹을 수 있다. 특히 학기 초에는 거의 처음 보는 사이인 나에게까지 간식을 나눠주는 섬세한 친구도 있었다. 무언가를 나눠먹고 있는 애들 근처에 가면 흔쾌히 '먹을래?' 제안해 주는 친구도 있었고, 점심시간에 통 크게 깐 양파링(뜯고 바로 다 먹어야 하는 이런 과자는 뜯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을 보고 달려간 나에게 수건 돌리기를 하는 것처럼 과자 봉지를 넘겨주는 친구도 있었다. 너무 웃긴 반이라며 즐겁게 학교에 가던 때에도, 반배정 망했다며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날에도, 간식을 받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도, 자기들끼리 간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스쳐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스했고 그들의 사탕 냄새를 몰래 맡았다.
노래가 한순간도 흐르지 않는 고등학교가 있을까. 학교에서의 노래는 음악실에서, 강당에서, 운동장에서, 여러 방식으로 또 여러 공명으로 흐른다.
음악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다. 업라이트 피아노, 디지털 피아노, 통기타, 칼림바, 카혼 등 충분한 악기가 갖추어져 있고 점심시간이면 모두에게 개방되는 음악실은 내 안전지대다. 피아노 의자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 박자가 엇나간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한다면 그만큼 경쾌한 것도 없다.
음악 시간도 좋아한다. 3학년이 되고서 이론과 자습의 비중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음과 리듬 없는 음악 수업은 없다. 청음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금 들린 음을 추측하려 애썼고, 선생님께서 신청곡을 받으시다가 신청자가 없어서 지목당한 애는 쭈뼛쭈뼛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말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날이면 제각각 손에 잡힌 악기에서 나는 소리가 음악실을 가득 메웠다.
그렇지만, 음악실도 좋지만, 체육 시간의 강당을 이제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니까! 가장 꼭대기인 3학년 교실이 미워서 매일 힘없이 걷는 나지만, 체육 시간 바로 전 쉬는 시간 종이 치면 누구보다 민첩하게 움직인다. 교과서를 쿨하게 덮고 조바심 내며 신발을 갈아 신고, 강당을 향해 계단을 달린다. 선생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배드민턴을 친다. 종이 치면 체육부장이 대표로 나가 준비운동을 하고, 선생님께서 오늘 할 활동을 말해 주신다. 주로 농구나 배드민턴 서브 등이 수행평가고, 자유시간인 날도 있다. 자유시간인 날이면 자판기 내기를 하면서 배드민턴을 친다. 그러다가 지치면 에어컨 앞에 딱 붙어 바람을 먹는다.
사실 체육시간을 처음부터 좋아하진 않았다. 워낙 운동을 못해서였다. 아무리 줄넘기와 배구를 해 봐도 내 체육 성적은 제자리였다. 점수는 발전의 기미가 안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대로니까...)
그런데 내가 체육시간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바로 ‘노래’다. 강당에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았다. 혼자 이어폰으로 들을 때랑 다르게 높은 천장까지 닿도록 울리는 느낌이 좋았고, 그렇게 큰 공간에서 음악 안에 감싸여 있는 느낌이 좋았다. 내 체육 점수에 삐져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가 음악을 틀었을 땐,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나는 용기 내서 친구에게 말했다. ‘나도 칠래!‘
그렇게 체육시간은 내 최애 시간이 되었다. 가득 울리는 노래 속에서 배드민턴을 치면 땀은 나는데 가뿐해지는 기분이었고, 서브 미스가 나도 금방 훌훌 털고 내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DJ를 맡는 친구들의 선곡을 궁금해하며 다음 노래가 나오길 기다렸다. 대부분은 그날 인기 차트 노래였고, 가끔씩 팝송이나 애니메이션 OST도 있었다. 용기 내어 신청곡을 말하면 다음이나 다다음 순서에 틀어 줬다.
나도 DJ가 된 적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유쾌한 기분이었다! 내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리며 ‘이 노래 알까?’, ‘이다음에는 신나는 노래를 틀어야겠다.’하며 고민하는 시간은 사뭇 진지했다. 어쩌다 옆에서 에어컨을 쐬던 애가 내가 튼 노래 제목을 물으면 그것만큼 완벽한 기분은 없었다.
땀을 잔뜩 빼고 나면 약속한 자판기 내기의 대가를 지불하러 갔다. 나는 거의 매일 졌기에, 흔쾌히 망고나 알로에를 뽑아 주었다. 차갑고 찰랑거리는 자판기 음료수를 들고 오르는 계단은 여전히 힘들었다. 체육 바로 다음 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께서 ‘너희 체육 했니?’ 물으시면 우리는 씩 웃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느껴 온 맑음이다. 물론 표현할 수 없는 울음과 실망과 실패의 기억도 많다. 그걸 여기 담지 않은 이유는, 나의 상상 때문이다. 중학생 때는 ‘지금이 가장 힘들어’라고 생각했고 지금의 나도 그걸 기억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중학생 시절을 좋아한다. 뭉뚱그리는 것도 아니고 지우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밑에 포스트잇으로 새 메모를 더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중학교를 좋아한다. 그땐 없었던 색의 포스트잇을 지금의 내가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과 비슷하게, 나는 미래의 내 카메라를 상상해 보았다. 지금을 소재로 할 나의 카메라를 흐리게나마 상상해 보면, 앵글에 담은 나의 기억은 모두 맑았다. 추억이라는 거름망을 뚫고 나온 나의 지금이었다. 빼곡한 말들과 심심한 낙서, 비밀스러운 웃음과 솔직한 울음이 있는 나의 고등학교를, 나의 지금 이 시기를 좋아한다. 생각이 많아도, 시험 성적이 우울해도 옆에서 들려오는 장난 소리에 픽, 웃어버리게 하는 이곳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