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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4. 2024

아직 모르는 모든 것들에게

 어디서부터 글을 시작해야 할까.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자판의 느낌이 생경하다. 나는 여전히 그럴싸한 스타일을 흉내 내는 초보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이제 그 허술함을 알기에 글을 쓸 때 머뭇거리게 된다.

 브런치 연재를 종료하고, 수능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잠시 버려두었던 수학을 다시 하자니 확률 계산은 자꾸 뭘 하나씩 빼먹고, 수열은 그냥 모르겠고, 적분은 기계적으로 했다. 국어랑 영어는 좋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풀려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사탐이라는 힐링 과목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머릿속에 빳빳한 지식들이 너무 가득 찬 것 같으면 나는 사탐으로 도피했다. 그래도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나의 성경을 펼쳤다. 그걸 읽고 싶어서 일부러 공부를 대충 하기도 했다. 이런 고백을 하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나의 성경은 유지혜 작가님의 <쉬운 천국>이다.

 첫 만남은 오히려 <쉬운 천국> 이후에 나온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였다. 열여섯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무렵 내 하루 루틴의 마무리는 침대에 누워 인터넷 서점을 구경하는 것이었기에, 신간을 훑어보고 베스트셀러 목록도 관찰하며 다가오는 잠을 반겼다. 그런데 가끔씩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발견해서 잠을 밀쳐 버리는 일도 생겼다. 내겐 '미미미마'가 그 사건이었다. 나는 이 작가를 몰랐고, 장편소설만 읽는 독서 편식도 심한 상태였으며, 에세이에 대해서는 더더군다나 편견이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 마음을 뺏긴 것은 첫째, 표지가 너무나 예뻤다. 그 표지는 마치 사랑이라는 성분으로 만든 해변 같았다. 추억이라는 조약돌, 애틋함이라는 모래, 소중함이라는 물결과 사랑이라는 햇살이 만들어 낸 완벽히 예쁜 해변이었다. 그리고 둘째,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나는 이 노래를 원래 알고 있었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짙고 부드러운 노랫말에 호기심을 느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바로 시내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책은 내가 직접 골라야 했다. 책의 위치를 프린트하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서, 맨 앞에 진열된 책은 피해서, 그 밑에 있는 것 중에서도 마음이 가장 잘 옮겨 붙는 것을 골라서. 그렇게 나는 용돈을 다 썼고, 새벽의 동료를 획득했다. 이 책은 나에게 진지한 행복으로 반짝이는, 그러니까 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닿기를 바라는 롤모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 책의 '사랑'은 무심하게 툭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뜨거운 마음으로 내뱉은, 새벽의 사유와 산책할 때의 감정, 눈빛이 스칠 때 같은 그만의 기억이 빼곡하게 차오른 말이었다. 말하고도 그 잔향을 살며시 느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다. 코로나19 시기에 나온 이 책에서 작가는 그동안의 여행과, 자신만의 기억, 사랑, 생각, 느낌, 사랑, 그리고 사랑, 편지를 썼다. 그렇기에 나는 멋모르고 동경했다. 생활복 상의에 체육복 바지만 입고 다니던, 아주 많은 소설을 읽지만 딱히 좋아하는 것을 고를 수는 없었던, 완전히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그러면서도 영원히 열일곱이고 싶은, 누구보다 흔들리고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고양이와 풍경과 가을에 다정한 시선을 나누어 주고, 일상의 조각을 주워 햇살에 비추어 보고, 편지를 쓰고, 기억에 눕고, 자신의 스타일을 찾고, '감동으로 오싹해지겠지'처럼 단어의 느낌을 새롭게 키우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 작가. 우리 둘 사이의 공간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조급함은 마치 콘서트장의 공명처럼 두근거리는 닦달이었다. 움직이고 싶게 하는, 1을 만들고 싶게 하는 격려였다. 나는 작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이클라우드에 더 많은 메모를 쌓아 갔고, 작가가 읽었다는 <나의 미카엘>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했고(하지만 완독했다), 후드티가 아닌 스웨터를 사고(엄청 오래 골랐다), 머리를 기르며 새카만 색깔에 만족하고... 나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나만은 자긍심에 씩 미소 짓고 싶었다.

 그해 겨울,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여행을 갔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머쓱할 만큼 숙소에만 머물렀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고, 그렇게 사 모은 책들로 가방을 채웠다. 숙소에서 책만 읽다가 무료하면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졸업과 입학 사이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봤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치인 것은 역시나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문을 열자마자 배어 나오는 향기, 뾰족하지 않은 피아노 음악, 유지혜 작가의 말처럼 '이 서점의 하루치 광고모델'인 책을 읽는 사람들. 나는 모든 것에 안도했고 아무도 모르게 심장은 뛰었다. 넓은 공간을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책을 골랐다. 바구니는 쓰지 않고 책을 품에 꼭 안았다. 그래야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다. <쉬운 천국>은 여행 3일 차에 샀다. 지금이야, 하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대충 양치를 하고 어제 입었던 후드를 입은 채 빠르게 걸었다.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교보문고로 들어가서, 검색하지 않고 그 넓은 공간에서 이 책을 어떻게든 찾아냈다. 두툼한 이 한 권을 꼭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거나, 같은 챕터에서 몇 번이고 맴돌거나, 긴장하고 이완하며 독특한 리듬감으로 책에 몰입했다. 밥도 잠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렌즈에서 초점은 오로지 이 책이었다.

 차분하게 이 책을 설명해 보자면, 내 설명보다는 책 겉표지의 말을 빌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시절의 여행들'.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의 여행, 그것도 다른 누구의 여행도 아닌 작가의 여행이었다. 오로지 자기만 가지고 출발해 진솔하게 써낸 날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있다. 나는 이 책이 무언가를 시사하려고 하지 않아서 좋았다. 섣불리 아는 척하지 않고, 무작정 껴안지도 않고,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에게 싱긋 미소 지어 주는 책이었던 것이다. 사람들 속에 있을수록 허무해지던 나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충만함이었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성경이 되었다. 백번 읽어도 지겹지 않을, '몇만 번 다시 사랑하게 될',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 '얄미우리만큼 완벽'한, '무작위로 되짚어보기에 좋은'.

 이 책을 몇 번 읽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스크래치가 잔뜩 난 겉표지와 손에 난 땀으로 벗겨진 코팅, 자기주장이 강한 낱장이 나와의 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매번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동시에 치열하게 나의 기록을 쌓았다. 되돌리고 싶은 나의 하루와 너무나도 끝내줘서 그 이상이 없을까 봐 두려운 한 밤산책, 초라하고 이기적인 것 같아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을 썼다. 조악한 문장 실력을 한탄하면서 장황했다가 또 심플한 글을 썼다. 어느 날 나는 작가의 문체와 조금 닮은 내 문장들을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이젠 결심한다. 오로지 나만의 문체를 만들자고, 누군가와 닮는다 하더라도 결국엔 '채여름스럽다'는 넉넉한 자유로움을 획득하자고.

 사실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연재를 할 때 소심하게 글을 썼음을 고백한다. 다 펼쳤다가 수습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 불꽃놀이를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지금 안타깝게 여긴다. 글로 쓰기 전에 머리를 굴렸고, 살짝 끓여 겉에 그럴싸하게 떠오른 생각들을 플레이팅해서 보여드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모든 글의 모든 부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 살펴보니 아쉬운 글들이 많다. 아쉽고 애틋하고 그럼에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글들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내가 자유로워졌구나, 자유라는 납작한 단어에 갇히지 않고 내 안에서 부푸는 생동감을 느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어떤 날보다 뿌듯하고 처음이 반가운 요즘이다. 끊임없이 쪽지를 쓰고 새로운 책을 읽을 마음이 생겼다. 여전히 웃음 장벽은 낮고 커피는 못 마시고 실전모의고사는 고통스러운 날들이다.

 나의 앞으로의 날들에 방황이 없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분명히 잔뜩 흔들릴 거라고 예측해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소중한 마음과 우정과 기억과 야망과 책이 이제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느 날 살며시 찾아온, 서서히 눈물이 차오를 만큼 고맙고 반가운 선물이다. 오랜 새벽과 가득 찬 아이클라우드, 초조한 표정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모두 내 안에 있음을 느낀다. 이제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 나도 한 권의 책을, 나만의 책을 펴내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충실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눈물과 미소와 눈빛과 머뭇거림과 달리는 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여기서 슬쩍 약속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여섯부터 열아홉까지, 자신을 '당신의 친구 유지혜'라며 나에게 우정을 허락해 주신 유지혜 작가님께, 더없는 감사와 미소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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