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역사
그런 게 있다. 내가 혼자 할 때는 재밌는데, 누가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마음. 아무리 만족스러운 창작물이라도 다른 사람이 보면 한없이 줄어드는 자신감. 내게 일기는 늘 그랬다. 도대체 일기 쓰기가 왜 숙제인 것이며(심지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그 과제는 계속되었다) 선생님들께서 초등학생의 일기를 봐서 얻어갈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돌려받은 분홍색 일기장에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코멘트를 적어놓으실 때면 더 뛰쳐나가고 싶었다. 정성스레 봐주신 건 감사했지만... 내 글을 읽을 때 선생님이 웃었을 걸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항상 진지하게 글을 썼지만 그 글은 대개 순수함, 유쾌함 같은 평가로 뭉뚱그려지곤 했기에 나는 내 글을 보여주길 싫어했던 것 같다.
기억나는 또 다른 일기는 바로 '교환일기'다.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생일(2010년대였다) 때까지 문구점에 가면 자물쇠 달린 일기장이 많았다. 열쇠는 여러 개 들어 있었고, 깜찍한 일러스트 표지 위에 반짝이는 커버가 또 더해졌으며 똑딱이까지 달린 이름하야 '비밀 일기장'이었다. 그걸 현금을 반반씩 내고 사서 친구와 돌려 썼다.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뜀박질하듯 쓰다가 점점 뜸해져서 그 일기장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결국 내게 일기는 거창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괜히 의미 부여하는 것, 동시에 끈기와 새로고침이 매번 필요한 것. 이런 내 생각은 지금도 일부 유효하다. 하지만 이제 일기가 '거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 끼여 홀대받는다면 모를까. 일기를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내가 다시 무언가를 쓰게 된 것은, 열다섯 살 가을이었다. 많은 역사가 궁지에 몰렸을 때 이루어지듯, 내 일기의 역사도 그때 시작되었다.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던 그 시절로부터.
진단받아보진 않았지만, 나는 그때 우울했다. 열다섯 살이 우울? 왜?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물론 열다섯이라는 나이와 우울은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 또한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중2병이겠지, 아 나 또 왜 이래, 하면서 방치하다가 결국 잠을 못 자게 되었다. 원인을 콕 집어서 말할 순 없겠지만, 아마도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 피아노를 못 하게 된 것,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다른 반 분위기 등이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잠을 어쩌다 한 번 못 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며칠 밤을 새우고 학교에 갔고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것으로 근근이 잠을 보충했다. 어디서 이게 나오는 거지 싶을 정도로 울었다. 그때 내 안에는 뒤죽박죽 섞이고 잔뜩 꼬인 말들이 가득했다. 이걸 정리하는 법은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어서 처치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들은 처음엔 귀 기울이다가도 금방 질색했다. 그때 나는 내가 세상의 기준 밖에, 아주 먼 곳에 있구나 느꼈다. 공부도 안 하고, 그렇다고 성실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은 열다섯 살. 나는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없었다. 뭐가 남아 있어야 증명을 할 텐데, 그래야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갈 텐데,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다. 내 안에 아무것도 없으니, 잠이 안 오면 아무 책이든 읽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을 자꾸 하게 되니까 뭐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관심은 없지만 남의 얘기라도 읽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 삶의 롤모델을 만났다.
그 책에서, 작가는 일기를 자주 썼다. 딱히 일기가 아니라도 노트를 펴놓고 뭐든지 쓰는 일을 자주 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 있는 친구들을 향해 매번 떠났고, 영혼으로 20대를 보낸 뒤 충만함으로 30대를 맞이했다. 내게 필요한 어른이었다. 생색내지 않는,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그 자체로 근사한, 섣불리 이해하지 않는 다정한 어른. 나 자신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는 쪽을 택했다. 아무리 읽어도 좋은 나의 롤모델을 향해 나는 팬심과 애정을 쏟아부었다. 눈물처럼, 사랑도 어디서 이게 다 나오는지 모르게 왔다. 그렇게 사랑의 총량을 채웠다. 딱히 나를 좋아하진 않더라도, 그를 좋아함으로써 나는 삶에 필요한 약간의 사랑을 회복했다.
그래서 일기를 쓰게 되었다. 결국 동경 때문에. 일기만 따라한 건 아니었고 그가 읽은 책, 본 영화를 섭렵했고 그가 좋아한다는 브랜드를 열렬히 구경했다. 공주놀이를 하던 어릴 때처럼 나는 '멋진 어른 놀이'를 시작했다. 그를 따라 하는 것만으로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소중한 것도 딱히 없었고 그래서 유약했지만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새벽에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뉴욕에 가 있었고, 그처럼 스웨터를 입으며 속으로 으쓱했다.
그렇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일기를 쓰는 것은 따라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일기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까. 따라 하려고 일기장을 펴봤자, 마주하는 건 나의 어설픈 문장력뿐. 처음에는 적을 내용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 한 일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일기를 썼다. 마치 초등학생 때 쓰던 그림일기처럼. 어쩌다 보니 나는 다시 어릴 때로 돌아왔다. 일기를 쓰는 것도 그렇고, 내 마음을 다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에서 나의 열다섯은 매일 새 마음을 만들던 어릴 때와 같았다. 삶이란 건 일직선은 아닌 것 같네, 그때 생각하게 되었다. 일직선이 아니면 어떤 모양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분명히 어딘가에서 만나고 때론 꼬이고,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 형태인 것 같다. 나는 마트료네시카 인형처럼 나를 꼭꼭 간직한 채 자랐다. 열다섯이 되고서야 그 사실을 발견했다. 삶이란, 한숨 쉬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적다 보니, 중간중간에 딴 길로 새는 일이 많았다. 딴생각을 하고 딴 길로 새는 것은 공부할 땐 안 좋고 산책할 때, 일기 쓸 때는 좋다. 그럴수록 일기장은 증식하고 산책은 낭만을 더하니까. 예를 들면 오늘 학교에서 수행평가로 과학 발표를 했다, 근데 피피티 글자를 좀 더 크게 할걸 그랬다, 그래도 몇 명은 들어 주더라, 살면서 발표를 몇 번 해야 할까, 피피티 템플릿은 대체 누가 다 만드나, 컴퓨터 언어가 우리 언어체계가 되면... 흔히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내 일기였다. 그렇다고 대단히 쓸 것도 없으니... 생산적이지 않고 한가한 일기지만, 일기를 쓰는 것은 세상의 여러 기준을 버리고 공중부양 하는, 그렇게 나 혼자 자유로워지는 일이 아닐까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을 지나 열아홉이 되었다. 그 시절을 간직한 채 나는 또 새로운 마음을 받아들이고, 오래된 마음을 슬쩍 보이며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젠 열다섯의 일기를 읽을 수 있다. 성장도 아니고 발전도 아니다. 그저 연약하고 다정한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일기를 쓰면서 나는 나아가는 법보다는 돌아보는 법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다. 뭐가 좋고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그런 기준 같은 건 없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냉소적이지 않은 것, 사소한 것을 좋아하는 것. 나는 그런 어른이 되어간다. 표지가 벗겨진 일기장을 옆에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