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다이어리 180622

존재의 발견

by 백홍시

일기에도 몇 번 언급했지만, 요즘 뜬금없이 가수 이상은에 빠져 하루 종일 영상을 틀어놓고는, 가끔 정신을 차려보면 홀려 들어갈 듯이 화면을 보고 있다. 이 기분은 마치 어린 시절 나의 우상, 배우 유지태를 좋아하던 것과 비슷하다. 밤늦게까지 팬페이지를 만들고 사진을 모으고 팬레터를 보내던 그때의 행복감.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어떤 물건이 좋아서 그것을 사 모으거나 어떤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거나, 어떤 음악이 너무 좋아서 머리가 쭈뼛 선다거나 하는 기분.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얼마나 오랜만인 기분인지 반갑고도 생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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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담다디>를 시작으로, 원래 알고 있었던 이상은의 음악들도 다시 들어보게 되었고 십몇년만에 CD도 구매했다. 물론 원래 알고 있었던 <공무도하가> 이후의 음악-일명 비 담다디 이상은-도 좋아하지만, 내가 새롭게 빠진 것은 88년부터 93년도까지 소녀들의 아이돌이었던 시절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음악과 영상들은 늘 있어왔던 것들이다. 몇십 년 전에 존재했던 것들, 유튜브에서도 몇 년 전부터 있었던 영상들에 이제야 빠져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어쩐지 재밌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떤 것이 존재하더라도 내가 모르고 나에게 발견되지 않으면 나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연히라도 발견되면, 어쩌면 나에게 엄청난 감정의 동요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 본 재미난 댓글이 생각났다. 어떤 사람이 예전에 방영하였던 무슨 드라마를 이제야 보는데 너무 재밌다며 글을 올렸더니 아래에 누가 댓글을 달기를, 그 드라마 결말이 끝내주는데 그걸 안 본 뇌가 부럽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결말을 볼 때의 재미를 앞으로 느낄 테니까 부럽다는 것.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갔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직 많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희망적이다. 이제 갓 영화를 보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명작을 보고 감동받을 기회가 수없이 펼쳐져 있지 않겠는가. 조금만 움직여 새로운 무언가를 접해 본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 모든 걸음이 새로운 걸음이었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얼마 전 에세이에서 읽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저자가 우연히 <겨울연가>를 보게 되고 그로 인해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엄청난 행복감을 느낀 부분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모른 채, 이 행복을 모른 채 죽었다면 나의 일생은, 아아, 그것은 아마도 손해 본 일생이었으리라. 진심으로 고맙다.
-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중에서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까지 살아서 이런 것을 보게 되어서 이 순간을 겪게 되어서 참 고맙다는 감정이 드는 순간.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한 번 둘러보면, 수많은 ‘나에게만 새로운 것들’이 여기저기서 뒹굴고 있지 않을까. 또는 이미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도 그런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별로라고 말했더라도, 지금의 나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늘 변하니까.

내가 아직 모르지만 내 취향에 딱 맞는 무엇인가를 계속 발견해 나가자. 살아있어서 고맙다고 생각하게 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언제 어디선가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은 고민 끝에 글 일기로 대체합니다. 글은 종종 쓰지만, 이런 류의 긴 글을 공개하는 것이 쑥스러워 고민 고민하다 올리네요. 오늘도 굿나잇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