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창작자를 기다리는 Empty Object라는 꿈

레거시, 매체, 그리고 창작자의 최솟값 - 레거시의 관성과 매체의 전환

by 김동은WhtDrgon

머리말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은 생각보다 복잡한 말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2시간짜리 필름인가. 영화관에서 보는 것인가. OTT에 올라오는 것인가. 스마트폰 세로 화면으로 재생되는 것인가. AI가 생성한 영상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진 것이, 지금 이 시대 창작자가 처한 상황이다.

창작자에게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레거시에 갇히는 것이다. 영화는 원래 이런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가능성을 먼저 닫아버린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레거시를 무시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새로운 것만을 쫓다가 여전히 레거시 위에서 소비하고 있는 거대한 시장을 놓친다.

이 글은 그 두 함정 사이에서 창작자가 어떻게 자신의 방향을 잡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레거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지금 영화와 콘텐츠 산업이 어떤 전환점에 있는지를 살펴본다.


1장. 레거시란 무엇인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와 필사본의 그림자

1450년경,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기를 발명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보 혁명 중 하나였다. 그런데 최초의 인쇄본들은 어떻게 생겼는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¹을 포함한 초기 인쇄본들은 필사본을 그대로 모방했다. 첫 글자는 크게 장식했고, 여백에는 삽화를 그려 넣었으며, 채색공²이 따로 손으로 장식을 더했다. 인쇄가 가능해졌음에도 책은 여전히 손으로 만든 것처럼 보여야 했다. 왜냐하면 책은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레거시가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대량 생산 체계가 본격화되면서 여백의 그림은 하나씩 사라졌다. 금박 장식이 없어졌다. 가죽 제본이 사라졌다. 지금 서점에서 사는 책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것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의 논리는 장식이 아니라 효율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필사본을 기억하는 사람들, 책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인쇄본은 필사본을 흉내 냈다. 그것이 레거시의 관성이다.


¹ 구텐베르크 42행 성경(Gutenberg Bible):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450년대 활판 인쇄기로 제작한 최초의 대량 인쇄 성경. 공식 명칭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며, 각 페이지가 42행으로 구성되어 있어 42행 성경으로 불린다. 현존하는 완본이 49부로 파악되며, 한 부당 수백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다.

² 채식 이니셜과 채색공(Illuminated Initial / Rubricator): 중세 필사본과 초기 인쇄본에서 문단이나 장의 첫 글자를 아이콘 크기로 크게 그리고 그 안을 그림이나 문양으로 장식한 것을 채식 이니셜(Illuminated Initial)이라 한다. 이 작업을 담당한 장인이 채색공(彩色工, rubricator)이다. 구텐베르크 시대 인쇄본에서 붉은색 표제, 금색 장식, 유색 삽화 등의 채색 작업은 채색공이 인쇄 후 별도로 수작업으로 추가했다. 현대 출판에서 문단 첫 글자를 크게 표시하는 드롭 캡(Drop Cap)이 이 전통의 흔적이다. 대량 인쇄가 본격화되면서 이 수작업 장식 전체가 제거됐다.


철교와 마천루

레거시의 관성은 기술이 바뀌어도 형태를 지배한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철제 다리가 건설됐다. 1779년 완공된 아이언브리지³가 그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다리의 생김새다. 철이라는 새로운 소재가 가진 장점, 압도적인 강도, 자유로운 형태를 활용하는 대신, 이 다리는 나무로 만들던 다리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아치형 구조, 장식적 곡선, 리벳 배치까지. 철로 나무를 흉내 낸 것이다.

다리는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기술이 성숙하면서 현수교, 트러스교, 사장교 같은 철만의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철이 나무의 대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소재로 인식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마천루도 마찬가지다. 뉴욕 초기 고층 건물들, 1880년대에서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것들을 보면 꼭대기에 가고일⁴이 올라가 있고, 물 배출구가 달려 있고, 중세 석조 건물의 장식이 그대로 붙어 있다. 철골 구조로 지으면서도 건물은 여전히 중세 양식을 따랐다. 건물은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은 예외 없이 반복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그 기술로 만든 첫 번째 결과물은 대부분 이전 기술의 결과물을 닮아 있다. 레거시가 새로운 가능성을 덮어쓰는 것이다.


³ 아이언브리지(Iron Bridge): 1779년 영국 슈롭셔주 콜브룩데일에 완공된 세계 최초의 주철 교량. 설계자 토머스 파른올스 프리처드(Thomas Farnolls Pritchard)가 기획하고, 에이브러햄 다비 3세(Abraham Darby III)가 공사를 완료했다. 프리처드는 착공 한 달 후 사망했다. 철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전통적인 목교의 형태와 목공 이음새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고일(Gargoyle): 서양 중세 건축에서 비가 내릴 때 지붕의 빗물을 건물 벽에서 멀리 흘려보내기 위해 설치한 배수구 형태의 석조 장식물. 그로테스크한 동물이나 괴물 형상이 많으며, 뉴욕 초기 마천루에 장식적으로 사용됐다.


영화라는 카세트 테이프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 영화는 연극을 닮았다. 카메라가 고정된 채 무대를 정면에서 찍었다. 에디슨의 초기 영화들이 그렇다. 영화는 연극이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연극처럼 만들어졌다.

그 이후 100년에 걸쳐 영화는 자신만의 문법을 만들어냈다. 편집, 클로즈업, 시점 샷, 몽타주⁵. 영화관이라는 공간,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시작·중간·끝이라는 3막 구조. 이 모든 것이 영화의 레거시로 굳어졌다. 그리고 전 산업이 이 포맷에 맞춰 재편됐다. 제작사, 배급사, 극장 체인, 영화제, 평론 시스템까지. 마치 카세트 테이프 규격에 맞춰 모든 음향 기기가 만들어지듯, 영화 산업의 모든 프로세스는 2시간짜리 극장 영화라는 형식 위에서 돌아갔다.

그 형식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몽타주(Montage): 영화 편집 기법의 하나. 서로 다른 장면이나 이미지를 연결함으로써 각각의 의미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법. 소련의 영화이론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체계화했으며, 영화만의 고유한 표현 언어로 발전했다.


2장. OTT가 바꾼 것과 바꾸지 못한 것

플랫폼이 바뀌면 무엇이 바뀌는가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왓챠. OTT⁶의 등장은 영화 소비의 물리적 조건을 바꿨다. 극장에 가서 표를 사고, 정해진 시간에 앉아 2시간을 보고 나오는 의식이 해체됐다. 집에서, 침대에서, 이동 중에,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시간에 멈추고 다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변화가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즉각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OTT에 올라오는 영화들은 여전히 2시간 내외의 극장 포맷을 따른다. 제작 방식도, 촬영 방식도, 편집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OTT 오리지널 영화들도 극장 포맷의 문법을 그대로 유지한다. 제작자들이 그 방식으로 훈련받았고, 관객들이 그 형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은 바뀌었지만, 그 플랫폼 위에서 작동하는 콘텐츠의 형식은 아직 레거시를 붙들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처음에는 필사본을 닮은 책을 찍어냈던 것처럼.


OTT(Over-The-Top): 인터넷을 통해 방송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 이 이름은 OTA(Over-The-Air)에서 왔다. OTA는 지상파 방송이 전파(電波)를 통해 안테나로 직접 수신되는 방식으로, 케이블·위성·인터넷 같은 별도 인프라 없이 '허공을 통해(over the air)' 전달된다는 뜻이다. OTT는 이 전통적인 방송 인프라를 '건너뛰어(over the top)' 인터넷으로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다. 넷플릭스, 디즈니+, 왓챠, 티빙 등이 대표적이다. (실은 저 top은 셋'톱'박스를 의미한다.)


숏폼이라는 균열

그러나 균열은 이미 시작됐다.

유튜브가 등장하기 전, 시청자가 만든 영상은 방송국에 투고하는 홈 비디오 정도로만 여겨졌다. 유튜브가 그 개념을 뒤집었다. 10분짜리 영상이 수백만 구독자를 모으고, 개인 창작자가 방송국보다 더 많은 시청자와 직접 만날 수 있게 됐다.

그 다음 단계가 숏폼⁷이었다. 틱톡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1분 이하의 영상이 콘텐츠 시장에서 먹힐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가 플랫폼의 중심이 됐다. 세로 화면, 15초, 즉각적 자극. 이것이 새로운 세대의 시청 방식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연극 중독자를 규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영화 중독자를 법으로 규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게임이 그 자리를 이었고, 지금은 숏폼이 그 자리에 있다. 새로운 매체는 언제나 도덕적 공황⁸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은 이미 확산된 다음에 이루어지는 뒷북이었다.


숏폼(Short-form content): 통상 1분 이하의 짧은 영상 콘텐츠. 틱톡이 대중화시킨 형식으로, 이후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로 확산됐다. 즉각적 자극, 세로 화면, 빠른 편집이 특징이며, Z세대 이하의 주요 콘텐츠 소비 형식이 됐다.

도덕적 공황(Moral Panic):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이 정립한 개념. 새로운 사회 현상이나 집단이 사회 전체에 위협을 가한다는 과잉 반응이 미디어와 여론을 통해 확산되는 현상. 연극, 영화, 게임, 인터넷, 숏폼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레거시 소비자와 새로운 세대

지금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주요 소비층은 40대에서 50대 초반의 X세대⁹다. 이들은 TV와 극장 영화로 성장한 세대다. 그들의 취향과 감각이 아직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착시를 만든다. 지금 극장 포맷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소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OTT에 납품하면 된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그러나 이 소비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점점 줄어든다. 그들과 함께 레거시도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동시에 숏폼에 익숙한 세대가 주요 소비층이 될 시점이 온다. 그 세대의 영화 감각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영화를 뭐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내가 원하는 것이 영화가 아닐 수도 있고, 게임일 수도 있고, 글일 수도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창작자는 이 두 흐름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레거시 소비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각이 레거시에 고정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X세대(Generation X): 통상 1965년~1980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 한국에서는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PC통신, IMF를 경험한 세대로 규정된다. TV와 극장 영화로 성장했으며, 2020년대 현재 40~50대로 콘텐츠 시장의 주요 소비층을 구성하고 있다.


3장. 두 종류의 레거시: 기술과 커뮤니티

레거시는 기술에만 있지 않다

1장과 2장에서 이야기한 레거시는 기술 레거시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필사본을 닮은 책을 찍었고, 철교가 목교를 흉내 냈고, 마천루가 중세 석조 건물의 장식을 달았다. 새로운 기술은 오래된 형식의 그림자를 끌고 시작한다.

그런데 레거시에는 또 다른 종류가 있다. 커뮤니티 레거시다.

장르 팬덤, 시리즈 관객, 특정 세계관의 독자들은 그 작품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집단 기억을 공유한다. 판타지는 이래야 하고, 히어로물은 저래야 하고, 이 캐릭터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기대. 이것은 물리적 기술이 아니라 관객의 마음속에 각인된 패턴이다.

기술 레거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나무 다리는 철교로 바뀌었고 저항이 없었다. 그러나 커뮤니티 레거시는 다르다. 이것을 건드리면 저항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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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메제웍스 CEO. 배니월드,BTS월드, 세계관제작자. '현명한NFT투자자' 저자. 본질은 환상문학-RPG-PC-모바일-쇼엔터-시네마틱-게임-문화를 바라보는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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