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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같은 사진 or 사진 같은 회화

by 와이아트



여기 회화 같은 사진, 혹은 사진 같은 회화 작품이 있다. 회화일까, 사진일까? 어떤 것이 더 실재에 가까울까?


04. 손 끝에 걸린 해, 162x112cm, Oil and inkjet print on canvas, 2024 복사본.jpg 유현미, <손 끝에 걸린 해>, 2024. (출처: 금호미술관)


사진,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문학의 영역을 아우르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비현실적인 공간을 담아온 유현미(1964-)의 개인전이 현재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01. 《유현미_하이브리드 리얼리티》 (포스터, 금호미술관).jpg 전시 포스터 (출처: 금호미술관)


전시명 : 유현미 개인전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기간 : 2025.08.01.(금) ~ 09.28.(일)

전시 장소 :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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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3층부터 지하 1층에 걸쳐 진행된다. 각 층마다 시리즈 별로 전시돼 있어 편안한 호흡으로 감상할 수 있다. 지난 20년 간 축적해 온 작가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전시다.




작품 제작 방식


유현미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을 알고 감상하면 좀더 이해가 쉽다. 물론 설명을 듣기 전 직접 유추해보고 싶다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 건너뛰어도 좋다.


십장생-No.10.jpg 유현미, <십장생 No.10 (거북이, 불로초, 바위, 물, 산, 구름, 학, 해, 달, 소나무)>, 2011. (출처: 박건희문화재단)


작가는 현실 공간에 일상 사물을 닮은 오브제나 조각을 설치하고, 그 위에 회화처럼 칠을 한다.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마티에르를 표현하기도 하며, 사방에서 조명을 주어 그림자를 없앤 뒤, 빛과 그림자를 직접 그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입체공간을 ‘촬영’해 사진으로 프린트한다.


누군가는 그냥 캔버스 위에 공간과 오브제를 그려 넣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요즘처럼 포토샵 같은 보정 프로그램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작가는 어떤 ‘한 끗 차이’를 의도한 듯하다. 조각인지, 회화인지, 사진인지 모를 어딘가의 경계를 탐구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다.


유현미, Canvas No.1, 2012. (출처: The Korean Art Museum Association)


작품 제작 기간은 상당히 길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78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결과물은 단 한장의 사진이지만, 작업 중간에 수백 차례의 촬영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중간 촬영을 통해 화면 안에 구성되는 오브제들의 구도를 확인하고, 채색된 오브제의 채도, 명도, 그림자도 계속해서 수정한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실에는 여러 세트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한 작품에만 몰두하다 보면 이미지가 눈에 익어 풀리지 않게 될 때가 있기 때문에 다른 세트 작업으로 갔다가 다시 넘어올 때도 있다는 것이다.


스크린샷 2025-07-31 오후 9.30.13.png 유현미, UFO No.2, 2013. (출처: The Korean Art Museum Association)


포토샵 등을 활용한 수정 없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완성된 작가의 작품은 건축, 조각, 회화, 사진 등 다양한 미술 장르들이 누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이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작업의 의도인 것이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이러한 의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들은 아주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고 감탄한다. 또한 아주 아름다운 사진을 보면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한다. 왜일까? 어쨌든 사진과 회화 이 두 가지를 합친다면 정말 누구나 공감하는 절대미를 찾을 수 있을 테고, 그것이 내가 갈망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생각했다." - 유현미


물론 작품은 사진과 회화만을 섞은 것이 아니다. 작가가 학부에서는 조소를 전공한 만큼, 배치된 오브제들은 조각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에 영상과 문학까지 더해지는데, 전시 제목 《하이브리드 리얼리티》에서처럼 다양한 매체가 ‘혼성(Hybid)’된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주목하는 ‘이미지’


작가가 주목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너무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어라 크게 고민하며 답할 사안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미지’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철학적인 개념일 수 있다.


이미지 이론을 내세운 플라톤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 플라톤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사물들은 불완전한 복사본(이미지)이고, 진정한 실체는 이데아라는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즉, 이미지란 현실 세계의 사물들을 모방한 것으로, 이데아에 비해 질적으로 열등하며,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곧장 반박한다. 이미지는 외부 세계의 대상을 인식하고 기억하며,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의 과잉 시대로 접어든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좀더 동의가 되는 듯하다.


스크린샷 2025-07-31 오후 9.32.17.png 유현미, Mirror No.1, 2013. (출처: The Korean Art Museum Association)


유현미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이미지는 회화, 사진, 조각, 영상 등을 포괄한다. 작업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에 가깝다. 이미지가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을 탐구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단지 회화인지 사진인지 카테고리를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기보다는, 세계와 이미지, 실재와 가상, 현실과 꿈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읽힌다.




<코스모스(COSMOS)> 연작


작가가 2013년 처음으로 선보인 <코스모스> 연작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오브제를 공간에 배치한 후, 그 위에 색과 그림자를 다시 그린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깨진 거울 파편이나 물이 담긴 컵, 공, 모래시계, 의자와 같은 일상의 사물들은 무중력 상태로 공간을 부유하거나 시간이 멈춘 듯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02. 작업실의 우주, 2013, 잉크젯 프린트, 194.8x130cm (5ea), 국립현대미술관 소장.jpg 유현미, <작업실의 우주>, 201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출처: 금호미술관)


작업실 안 일상의 사물을 담은 것 같지만, 작가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우주 공간을 떠도는 행성처럼 묘사했다. 작가는 우리 눈앞에 있는 먼지나 은하수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작품 제목인 코스모스(cosmos) 또한 우주를 뜻하는 말인데, 이처럼 우주를 질서 있고 조화로운 시스템으로 간주하는 우주관을 작품에 담아낸 것이다.


유현미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리얼리즘’ 회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대상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포착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작품을 계속 보다보면 꿈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초현실주의’로 다가온다. 물론 작업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 꼭 카테고리화할 필요는 없다. 작가의 이미지들은 2차원과 3차원, 실재와 환상,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뒤흔들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상상적 가능성을 전달하고 있다.




<굿 럭(Good Luck)> & <십장생> 연작


2층 전시장을 채운 <굿 럭>과 <십장생> 연작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십장생(十長生)은 한국 전통 회화에서 장수를 상징하는 열 가지 자연물이나 생물을 가리킨다. 열(十) 가지 오래(長) 사는(生) 것들을 이르는 말로, 해, 달, 산, 물, 바위,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이 대표적이다.


06. 십장생 책가도 No.3 (해, 달, 구름, 소나무, 물, 바위, 사슴), 2011, C-프린트, 99x150cm.jpg 유현미, <십장생 책가도 No.3 (해, 달, 구름, 소나무, 물, 바위, 사슴)>, 2011. (출처: 금호미술관)


십장생은 ‘굿 럭’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는 인간이 염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조선시대 전통 정물화에 서구 정물화의 빛과 그림자를 더하고, 십장생과 책가도를 결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습이다. 조각을 통해 입체화한 십장생 오브제를 조합하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한 것이다.


07. 금호미술관 《유현미_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jpg 《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 (출처: 금호미술관)


금호미술관에 전시된 <십장생> 시리즈 작품들은 대상의 배치와 구성에 보다 집중한 모습이다. 작품 속 사물들은 불안한 현실을 반영하듯 아슬아슬한 수직 구조로 쌓여 있다. ‘집’이라는 소재는 불안정한 구조의 가장 꼭대기에 놓이며,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2024)와 같은 제목을 통해 누구나 꿈꾸는 행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람을 전하고 있다다.


<십장생> 연작도 실제 공간을 회화처럼 꾸며 사진으로 찍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다만, 이 연작에서는 카메라에 의해 평면으로 박제된 세계가 캔버스에 프린트된 뒤, 캔버스 표면에 덧칠되는 유화로 인해 다시 입체적인 모습을 띤다. 스마트폰 화면으로는 매체의 혼성이 주는 모호함이 다 담기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하는 눈속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전시장에서 직접 작품을 감상해보시라.




<그림이 된 남자>


1층 전시장의 <그림이 된 남자>도 인상 깊게 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현미 작가가 직접 저술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 작업이다. 아래 작품은 사진이고, 건너편에 20분가량의 영상 작업을 감상하실 수 있다.


스크린샷 2025-07-31 오후 8.48.43.png 유현미, <그림이 된 남자>, 2009. (출처: 갤러리나우)


영상 속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웃들에 의해 흰 젯소 프린트로 칠해지면서 공간에 결박된다. 방 안의 사물들과 함께 점차 하나의 그림으로 변해간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연출이다.


08. 금호미술관 《유현미_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jpg 《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 (출처: 금호미술관)


남자의 신체는 희푸른 색의 페인트로 완전히 덮여 창백한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고, 유일하게 눈동자만이 살아 움직이면서 의식이 잔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눈동자가 너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관람객 중 한 분이 전시장에 있던 작가에게 질문하는 모습도 보았다. 눈이 약간 충혈된 듯이 표현돼 있어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의 모습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문학과 영상이 작업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감상의 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수의 육체> 연작


숫자를 주제로 한 <수의 육체> 연작도 재미있다. ‘숫자’라는 것은 무형적인 특성을 가짐과 동시에 가장 유형적인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숫자가 지닌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탐구하면서 숫자의 입체적 형태를 새로운 풍경으로 재구성한다.


스크린샷 2025-07-31 오후 9.06.06.png 유현미, <8888>, 2014. (출처: The Korean Art Museum Association)


<수의 육체> 연작은 미술관 1층 로비의 ‘설치’부터 시작된다. 아라비아 숫자 조각들이 바닥과 테이블, 의자 위에 놓여 저마다 다른 크기와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하 1층 전시장의 ‘평면’ 작업에 쓰인 소품들로 보인다. 숫자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09. 금호미술관 《유현미_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jpg 《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 (출처: 금호미술관)


작가가 어떤 숫자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나름의 상징성과 의미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4번 째 별의 인물을 담은 작품도 있다. 소설 속 네 번째 별의 인물인 별을 세는 사업가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상징한다. 어린왕자가 “꽃향기를 맡아보지도, 별을 바라보지도,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네 번째 인물이 작품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감상의 포인트다. 이외에도 작가는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이야기, 1~10 사이 중심을 지키는 가운데 숫자로서의 ‘5’ 등을 표현하며 수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스틸 라이프(Still Life)> 연작


감상 순서로는 마지막이지만, <스틸 라이프>(2005~2006)는 사진 작업의 출발점이 된 연작이다.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벽, 창문, 모서리, 계단 등이 있는 작업실을 세트 삼아 사물과 공간에 그림처럼 색을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의 원조격이라 볼 수 있다.


10. 금호미술관 《유현미_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jpg 《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 (출처: 금호미술관)


정물화를 뜻하는 ‘스틸 라이프’는 회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장르다. 작가는 작업실의 한 모퉁이를 무대 세트장처럼 꾸며 오브제와 색을 바꾸고 정물화를 생산한다. 작품을 위해 겹겹이 칠한 두꺼운 물감과 고전 회화에서 보이는 안정적인 구도는 북유럽 르네상스 정물을 연상시키는 한편, 함께 놓인 사물들의 기이한 조합과 인공적으로 연출된 표면 질감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03. 금호미술관 《유현미_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jpg 《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 전시 전경 (출처: 금호미술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작가는 회화, 조각, 사진의 특성을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시각적 착시와 긴장감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경계를 탐색한다. 하나의 장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체를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원본을 재현하는 과정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조각적인 회화, 회화적인 조각, 회화적 사진, 사진 같은 회화는 시각적 환영주의를 역설적으로 비틀어 하나의 매체에 또 다른 매체의 속성을 섞는다.”
- 정현(미술비평가)


전시 제목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응축한다고 볼 수 있다. 회화 같은 사진, 사진 같은 회화처럼 현실과 환영 사이를 오가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드러낸다. 유현미는 탈장르적 사고를 통해 이미지와 실체, 안과 밖, 실재와 허구 사이의 간극을 탐색하고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감각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편견 없이 작품을 감상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무엇을 그린 거고,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정답을 내리기보다는 마음이 가는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르기를 권한다. 익숙한 장르적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이미지의 관계를 탐색해온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면 무한한 상상력과 사유의 가능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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