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꼬레아”를 발표하는 순간 당시 박영수 서울시장이 감격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다.
88올림픽을 전후로 국민들의 준법정신이나 서민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IOC 총회에서 선택받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이 확정되자 테레비로 지켜보던 많은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우리가 과연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우리나라 국력의 신장을 피부로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올림픽 개최는 국력의 상징과 국제화의 진입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올림픽 이전에는 길거리에서 담배꽁초를 당연하게 버렸고 가래나 침을 뱉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올림픽을 통해서 전 세계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인류의 최대 스포츠 잔치였으니 주인이 손님들을 불러 놓고 볼 상 사나운 광경을 보여주지 말자는 시민들의 자각도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이 1968년 동경올림픽을 통해서 세계 2차대전 패전국에서 다시 경제대국의 위용을 과시했듯이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중국은 2008년에 북경올림픽이 큰 전환점이 되었다.
88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앞서 치러진 86아시안 게임을 시작으로 훗날 2002년 월드컵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 날 서독 하늘 아래 한국인들의 격한 포옹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대한사격연맹 회장이던 박종규는 1978년 서울에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면서 한국을 방문했던 많은 세계 사격계의 VIP들이 "한국은 올림픽을 치를 만한 능력이 있다"는 찬사를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박 회장에게 잇따라 보내왔었다고 한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때 보여준 장면으로 ‘피스톨 박’의 별명이 있었는데 사격연맹 회장과 연결되는 잔상이 자연스럽다.
박종규는 1979년 2월 체육회장 겸 KOC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스포츠 외교력을 강화하였고 올림픽 개최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3월에는 올림픽 서울 유치 건의안을 문교부에 제출했고 주일대사관을 통해 일본의 64년 도쿄올림픽 관련 자료를 수집해 자체적인 검토 결과 국익을 위하여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승인을 얻지만 10.26 발생으로 미뤄지다가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올림픽 유치 경쟁은 서울과 나고야의 대결로 압축됐다.
미국 NOC 사무총장 돈 밀러, 영국 NOC 사무총장 리처드 팔머가 ANOC조사단으로 내한했다. KOC로서는 돈 밀러가 제일 먼저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54년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2년 동안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을 보았고 스탠드도 엉성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경기를 한 경험마저 있던 밀러는 25년 만에 다시 본 서울의 발전상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밀러 일행은 서울의 무서운 추진력에 감탄하고 올림픽 개최 능력을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는 호신용 스포츠로 범세계적인 인기를 끌로 있던 태권도의 "대부"라는 점을 활용, 북 중미 및 유럽의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를 순방하면서 해외 사범들의 협조 아래 그 지역 IOC 위원들에게 서울 올림픽 지지를 호소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여 행정관, 외교관, 경제인, 체육인 등 이질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유치단의 팀워크를 이끄는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투표 결과 서울 52 나고야 27
여담)
. 처음 명칭은 ‘팔십팔 서울 올림픽’이었는데 욕설의 느낌을 준다고 88올림픽으로 변경되었다.
. 88올림픽 개회식 가수로 김연자가 선정되었다가 코리아나로 변경되었는데 아마도 김연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 바덴바덴시의 옛 철도역 자리에 펼쳐진 제24회 올림픽 유치 신청 도시들의 전시관 개관식에 영어, 불어, 스페인어에 능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와 미스코리아들이 한복 차림으로 안내 서비스를 수행했다.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는 에스파냐의 체육장관을 지내고 제7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IOC를 파산 위기에서 구하고 올림픽 경기대회를 수익사업으로 전환시킨 공적으로 종신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88年第24届夏季奥运会举办地,萨马兰奇IOC主席宣布"首尔,韩国"的瞬间,当时朴永洙首尔市长激动地高呼万岁的场面。
88奥运会前后,国民的守法精神和市民意识也发生了很多变化。
在IOC大会上被选为奥运会举办城市,首尔确定后,通过电视观看的许多国民心中产生了我们真的能举办奥运会吗?的疑问,同时也成为切身感受到我国国力增长的契机。
奥运会举办被接受为国力的象征和国际化的进入,奥运会之前在街上理所当然地扔烟头,随地吐痰的人也不难看到,但通过奥运会邀请全世界人民来到韩国,这是人类最大的体育盛会,主人招待客人不要展示难看的景象,市民的自觉也发挥了很大作用。
正如日本通过1964年东京奥运会从第二次世界大战战败国再次炫耀经济大国的威力一样,韩国是1988年首尔奥运会,中国是2008年北京奥运会成为了重大转折点。
88年奥运会的成功举办从先前举行的86亚运会开始,成为后来2002年世界杯和2018年平昌冬季奥运会举办的信号弹,想到这一点,记得那天在西德天空下韩国人激动拥抱的人应该很多。
担任大韩射击联盟会长的朴钟圭,1978年在首尔成功举办世界射击锦标赛时,访问韩国的许多世界射击界VIP陆续向当时的朴正熙总统和朴会长发出了"韩国有能力举办奥运会"的赞誉。
朴钟圭警护室长因陆英修女士遇袭事件时展现的场面而有"手枪朴"的绰号,这与射击联盟会长的联系很自然。
朴钟圭1979年2月就任体育会长兼KOC委员长后,强化了体育外交力,开始具体化奥运会举办构想。3月向文教部提交了奥运会首尔申办建议案,通过驻日大使馆收集了日本64年东京奥运会相关资料,经过自主检讨得出了为了国家利益是可取的结论。
最终得到了朴正熙总统的批准,但因10.26事件而推迟,全斗焕总统就任后,奥运会申办竞争压缩为首尔和名古屋的对决。
美国NOC事务总长唐·米勒、英国NOC事务总长理查德·帕尔默作为ANOC调查团访韩。对于KOC来说,唐·米勒第一个访问首尔是幸运的。
54年配属驻韩美军,在韩国工作2年期间看到了战争废墟中的首尔模样,甚至在看台简陋的首尔运动场棒球场比赛过的米勒,时隔25年再次看到首尔的发展不得不赞叹,据说米勒一行对首尔可怕的推进力赞叹不已,确信了举办奥运会的能力。
金云龙世界跆拳道联盟总裁利用作为风靡全球的防身体育跆拳道"教父"这一点,巡访北中美及欧洲的荷兰、英国、比利时,在海外师范们的协助下向该地区IOC委员呼吁支持首尔奥运会。
郑周永现代集团会长作为全国经济人联合会会长发挥影响力,作为引领由行政官、外交官、经济人、体育人等异质人士组成的申办团队合作的核心人物而活跃。
投票结果 首尔52 名古屋27
题外话)
最初的名称是"八十八首尔奥运会",因为有骂人的感觉而改为88奥运会。 .88奥运会开幕式歌手选定了金妍子后又改为Koreana,金妍子的立场想必感到非常冤枉。 .在巴登-巴登市旧火车站遗址展开的第24届奥运会申办城市展览馆开馆式上,精通英语、法语、西班牙语的大韩航空空姐和韩国小姐们身着韩服提供了引导服务。 .胡安·安东尼奥·萨马兰奇(Juan Antonio Samaranch)曾任西班牙体育部长,被选为第7届国际奥林匹克委员会(IOC)主席。因将IOC从破产危机中拯救出来并将奥运会转变为盈利事业的功绩,被推举为终身名誉主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