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2 기억을 비교하자면 같이 놀이한 친구들이나 운동을 하거나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녔거나 누군가에게 혼이 났거나 했다면 또렷하겠지만 그 외는 어차피 희미한 기억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맞지 않겠나?
아버지가 정천초 25회라고 하는데 25회면 1920년대에 개교했으니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가 깊은 학교라고 볼 수 있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 무단정치 시대로 조선어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학교에서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조선어 시간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일제 강점기가 36년만 더 유지되었더라면 한글은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상상이란 말인가?
실제로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어 잔재’가 여기저기에서 남아있었고 오죽했으면 국어순화운동을 한다며 일상생활에 잔존했던 일본어에 대한 한글 대체사용이 강조되던 시절도 있었으니 말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약 2킬로 거리로 30분 정도면 아버지의 날랜 걸음걸이로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루는 쌍둥이 동생과 산에 핀 철쭉을 진달래로 오인하여 뜯어먹고 집에 가서 토하다가 어지러워 매슥거리다 못해 정신을 잃었다가 살아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이 놀라셨다고 한다.
특히나 내가 어릴 적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상대적으로 무병장수하셨던 할머니에 대한 모습을 떠올리자면 당시 쌍둥이들의 철쭉 독성에 대한 후유증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졸이셨을 할머니의 얼굴이 그려진다.
하마터면 막내 격인 쌍둥이들을 한꺼번에 잃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아슬아슬하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그때 만일에 잘못이라도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애꿎은 철쭉만 악역을 담당한 격인데 앞으로 김 씨 자손들은 철쭉을 멀리서 보기만 하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일본인 교장이 있던 국민학교를 다닐 때 그렇게 무서웠다고 기억하시며교장선생님이 너무 엄격한 교육방침으로 학생들을 대했다고 한다. 이렇듯 조선인 학생의 눈에 비친 무서운 일본인 교장선생님이 90살을 바라보는 노신사의 기억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울러 다른 일본인 선생님이 1-2명 더 있었고 나머지는 한국인 선생님이었는데 수업을 일본어로 해야만 하던 시절이었기에 그 한국인 선생님들도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체 수업을 일본어로 진행했다고 하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일본은 생각할수록 무서운 민족임을 늘 잊지 말고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여담)
. 정천초는 1832년 향교 흥학당이 자리했던 곳으로 1906년에는 일본인의 내정간섭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를 모아서 명의숙이 개교했다가 1923년에 공립보통학교로 개교되었으며 용담댐 수몰로 1998년 폐교되었다.
지금은 정천면 용담공원으로 1만441㎡의 부지에 20종의 교목류와 관목류 4,000주, 초화류 5,000본이 식재됐으며 기념비와 산책로 등을 구비하고 있다.
. 철쭉의 독성은 애벌레로부터 꽃을 방어하기 위해 분비하는 그레이아노톡신 성분으로 꽃잎이 좀 끈적거린다 싶으면 철쭉이다. 독성이 있어서 먹은 후에 심한 배탈과 구토를 하게 되며 사실 접촉만으로도 피부염이 생길 수 있어서 만지지도 않는 게 상책이다. 잎 없이 꽃만 있는 것은 진달레, 잎과 꽃이 같이 있는 것은 철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