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께서 1919년 기미년생이면 6.25가 발생한 1950년은 32살 시절로 훗날 농사를 지면서 면서기를 하셨다는 것을 보면 그 시절 지역사회에서는 한학을 공부한 지식인으로 활약하신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고모와 다른 식구들이 피난을 와있었다고 하는데 부족한 살림살이였지만 농사를 지면서 전쟁의 신산한 삶을 잘 이겨 내셨던 강인한 분이셨으리라.
장녀인 어머니가 아버지와 고1에 도시로 나와 팔촌 언니 집 방 한 칸에서 父女가 함께 자취를 시작했고 어머니가 고교를 졸업할 시점에 제재소 사업을 시작하신 외할아버지는 당시 신작로 부근에 집을 마련하시어 시골에 있던 다른 가족들을 이사를 시키면서 온 가족이 완전체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럼 고1부터 외할아버지한테 장녀인 엄마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던 것인데 父女의 정이 돈독하지 않으래야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시절에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좋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나서 아들에게 전해주기를 기원드립니다.
부디 아름다운 그 추억 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셔서 좋았던 시절 속의 기쁨과 보람을 다시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의 브라보 인생을 응원합니다.
결혼 후 아버지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라 하셔서 가정을 등한시했다고 하는데 나와 동생들의 기억에는 그리 심각했던 잔상들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있을 수 있는 감성의 부족함들을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으로 훌륭하게 매워온 어머니 내공의 힘이 아니었겠는가?
여동생한테 어머니와의 추억을 물었더니 한 가지가 떠오른다고 한다.
여동생의 추억은 사실 나도 기억이 난다.
일명 ‘가족탕’.
집 근처 <노벨탕>이라는 나름 지역사회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목욕탕이 있었다.
이름이 <노벨탕>이었고 초교 시절 나의 추억 속 약국 이름도 <노벨 약국>이었던 것을 보면 당시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노벨상을 부각해 과학입국을 강조하던 시기에 작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담)
.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알프레도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6개 부문(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 경제학)에 대한 수상이 이뤄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