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이 된 오랜 친구에게
말기암이었던 친구 C가 며칠 전, 38세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는 바쁘다는 핑계로, 결혼한 이후로는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하는 못난 깍두기였다. 그렇게 나의 시간은 빠르게 때론 느리게 흘렀고, 삼십대가 넘어가면서부터 친구들과는 행사나 있어야 만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친구들이 항상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고 믿었다. 영원한 이별이 뭔지도 잘 모르는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삼일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친구는 두시간 만에 한 줌 재가 되어 어느 산자락에 몸을 뉘였다. 세상에 머문 시간도, 사연도 모두 소용없는 지독히도 짧고 간결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내가 C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식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밖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부턴가 건강했던 시간보다 아팠던 시간이 더 많았던 그녀였기에, 아픔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품어준 귀한 사랑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젠 힘들었던 과거는 탁탁 털어버리고,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기막히게도 내가 C를 다시 만나는 자리가 그녀의 장례식장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영정 속 C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보랏빛 꽃밭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말기암이었던 친구는 응급수술을 마치고 내내 고통 속에 있다가,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몇 시간만에 떠났다고 했다. 그토록 하고 싶은 게 많고, 꿈이 많았던 네가 얼마나 지쳤으면 그렇게 스르륵 삶을 놓았을까. 모래가 모두 떨어져버리기 직전에 누군가 억지로 눕혀둔 모래시계 같았던 너는, 무겁게 매달아놓은 연명줄들을 떼어내자 그대로 스르륵 흘러가 버렸다. 너의 영정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너를 위해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슬픔을 추스르기에도 벅찰 식구들을 대신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음식을 나르고 상을 치우는 것이 전부였다.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을 가슴에 묻은 채 돌아와 너와의 시간을 되새겨본다. 비록 부치지 못할 편지이지만, 어디에선가 한 줄기 바람으로 다가와 가만히 읽어주리라 믿는다.
너와 내가 만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이니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너와 나는 나란히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과 차상을 수상했었지. 글 욕심이 많았던 나는 내가 2등이라는 사실에 주최측의 실수가 아니냐며 다소 비뚤어진 마음으로 문집에 실린 너의 글을 읽었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네가 겪은 삶의 파동은 14살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찬 폭풍이 있었다는 것을 말야. 너는 어린 시절의 투병의 기억에 대해, 삭발한 머리로 인해 받았던 시선과 세상에 대해 참으로 담담한 어조로 풀어놓았었다. 나는 네가 그렇게 아팠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 170이 넘는 커다란 키에 큰 눈, 밝고 활달한 성격의 네가 소아암 환자였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그래서인지 너는 항상 타인의 고민과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알았고 마음 한 켠을 내어주는 법을 아는 아이였어. 태생부터 어딘가 삐딱하고 사교성이 결여된 나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지. 반이 바뀌어도 넌 우리 교실까지 참 자주도 날 보러 와주곤 했었어. 그런 네게 고마워서였을까. 만화를 좋아하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네게 맞춰주기 위해 스프링노트에 팔자에도 없는 만화 주인공을 그리고 코스프레에 관심있는 척 열심히 장단을 맞추던 나를 생각하니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우리는 어느새 십대 소녀에서 수험생을 거쳐 성인이 되었고, 각자의 삶이 바빠졌지만 그래도 언제든 어제 만난 것처럼 연락할 수 있는 사이였었지. 네가 불현듯 모든 것을 던지고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뒤로 하고 해외로 도망가듯 떠났을 때도, 나는 놀라지 않았었다. 너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꼭 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으니 말이야. 그런 네가 몇 년 뒤 잘 살고 있다는 연락 대신, 몸이 좋지 않아 급작스럽게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많이 놀랬었다. 그래도 그때는 네가 많이 아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어. 마치 고혈압이나 지방간이 생겼다고 말하듯, 암에 걸렸다고 툭 말하는 네가 기막혔지만 나는 그깟 항암치료 후딱 끝내버리고 술이나 한잔 하자는 따위의 더 어처구니없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었어. 그런 개뼈다귀같은 말이나 늘어놓는 나를 푸하하 하고 비웃어줄 만큼 너는 여유롭고 의연했었다.
그 힘든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빠져버린 머리를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민머리로만 할 수 있는 코스프레를 하며 웃음을 만들었고, 아프다는 고백을 하며 울기보다는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달라며 당당히 졸라댔었지. 그런 너의 밝음을 기억하기에 너의 마지막을 보러 온 모든 친구들은 한결같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좀처럼 아픈 티를 내지 않으니, 삶의 끝자락에서 오래도록 위태롭게 서 있었는지를 거의 모두가 몰랐던 것 같더라.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네게 끝이 다가오고 있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불현듯 네 생각이 나서 내가 연락했었던 것이 네가 떠나기 한달 전 쯤이었지. 나보고 촉이 기막히게 좋다며, 몸이 안좋아져서 입원하러 온 길이라고 했었지. 마치 진통제나 한 대 맞으러 온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지 않아 평소같으면 잘 묻지 않았을 너의 상태를 집요하게 캐물었었다. 너는 마지못해 툴툴대며 항암을 끝냈는데 전이가 되었다고, 장기가 부어서 힘들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그 때 너의 상태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말기암의 증상이자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왔음을 깨달았지.
그때부터 거의 매일같이 나는 너에게 오늘의 날씨를 이야기하고 컨디션을 물었던 것 같다. 답이 오면 안심하고, 답이 늦어지면 불안해하던 날이 보름쯤 지속되었을까.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도 메신저의 1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며, 나는 너와의 대화가 영원히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어. 간신히 네 결혼식장에서 본 남편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어렵게 연락이 닿았지. 그리고, 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말을 들은지 불과 일주일 후쯤 되었을까. 네가 마지막 숨을 놓고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하늘도 오열하듯 비가 쏟아지던 날, 네 영정 앞에서 네 어머니의 차갑고 메마른 손을 꼭 잡았다. 오래도록 투병한 딸이 이제 조금이라도 편해졌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어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의연한 모습이셨다. 그러나 나도 자식을 키우는데,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을 감히 어떻게 짐작조차 할 수 있겠어. 친구들끼리 보던 너의 사진을, 영상을 모아 어머니께 전해 드리면서도 나는 차마 그런 어머니 앞에서 목놓아 한 번 울어보지도 못했다. 그저 너의 사진 앞에 떨어진 향을 치워주고, 국화를 갈아 꽂아주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네가 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하고싶은 많은 말을 가슴으로 삼켰다. 너는 내 마음 속에 있으니, 내가 굳이 뱉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 믿으며 말이야.
친구야.
이제 다시는 널 부를 수 없음을 실감한다. 꿈도 많고 재주도 많았던 네가, 그래도 남들보다 곱절 이상 부지런히 하고싶은 일 마음껏 해보며 살았으니 조금이라도 미련이 덜했으면 싶다. 이제 아픈 육신 훨훨 던져버렸으니, 네가 가장 좋아했던 마마무 노래 마음껏 들으며 하고싶은 것 실컷 하고 있어라. 가끔 속 털어놓고 싶을 때 찾아가면 자리 펴 놓고 기다리고 있어주고. 살면서 가끔, 자주, 많이 생각날 나의 사랑하는 친구. 부디 그곳에서는 영원한 안식이 허락되기를. 먼 훗날,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