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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Dec 03. 2020

나는야! 뚜벅이로 사는 헛똑똑이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


은행에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남자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기다란 현수막을 걸고 있었다.


" 사무직 남녀 사원 00명 모집. 고소득 보장."

지하철이나 전신주 광고에서 많이 본 문구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인데 고소득 보장이라는 문구를 자신 있게 내세울까 늘 궁금했다. 저녁에 남편에게 낮에 봤던 현수막 이야기를 하며  친구하고 한번 가볼까 했더니 대뜸 이 헛똑똑이 바보야, 그곳은 영업직이나 다단계야 하 사정없이 핀잔을 준다.


"그래, 내가 바보면  나하고 같이 사는 당신은 뭔데."

"바보 남편."

이런 우리 남편을 누가 말리겠는가.


 "당신 생각 안 나,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그 여자"

남편이 불쑥 10년이 훨씬 지난 옛날 일을 소환한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학년초 학부 총회가 있어 참석을 했다가 끝나고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2학년 때 같은 반 아이 엄마였다.  


" 우리  커피 마시러 가는 길인데 한잔하고 가요. 오늘 제가 쏩니다."

차를 마시는 내내 그녀는 선생님답게 아이들 학원은 무슨 학원을 다녀야 하며 어디 어디가 좋다더라는 정보를 술술 쏟아냈다. 그러면서 영어는 원어민이 일주일에 두 번씩 집으로 오는데 발음도 좋고 실력도 괜찮다며 필요하면 소개해 주겠다고 하자 엄마들이 여기저기서 연락처를 주며 부탁을 한다.


"가희 엄마는 필요 없어요?"

하며 가만히 있는 내게 명함 한 장 내밀며 연락처를 묻는다. 00 회사 실장.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저 투잡 뛰어요."

옆에 있는 엄마들은 벌써 다 아는 눈치다.

 

"얼마 전 겨울 방학 때 우리 부서 실적이 1위를 해서 유럽 여행도 다녀왔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저 투잡 뛰어요라는. 그녀의 말이 이유 없이  이상한 기분으로 계속 머릿속에 남아 맴돌았다.  


그런데 며칠 후 뜻밖에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는데 차 한 잔 줄 수 없냐고 묻는다. 찻잔을 마주하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꾸준히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 나는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일을 찾고 있었던 터라 순간 솔깃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은 회사원처럼 고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일이 아니라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 어!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 아주 좋은 곳으로요." 하며 싱긋 웃는다.

그녀는 나를 차에 태우고 시내가 아니라 외곽으로 빠졌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도 여주 어느 큰 빌딩 앞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에 진열대가 세워져 있고  안에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는 큰 강당이었다. 강당 연단에는 이미 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넷째 형부였다.


형부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멋진  곳이 있다면 잘 다니던 회사를 퇴직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싱글벙글하며 황금알 낳는 거위라며 나도 남편도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날마다 전화로 성화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오가피, 알로에,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옥장판 등을 파는 다름 아닌 다단계 회사였다. 그 후로 형부는 1억에 가까운 돈을 날리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순간 나는 뭔가로  뒤통수를 한대 세게 얻어맞진 기분이 들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며 쫓아 나왔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 아! 그때 진짜 황당했지. 나는 선생님이라는 그 직책을 너무 믿었어. 정말 순진해. 그리고 경제관념도 1도 없는 사람이 무슨 돈을 벌겠다고.  당신 말대로 나는 진짜 바보 청이야."

돈 한 푼 안 들이고 인생 공부 야무지게  했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콩나물 2000원

시금치 2500원

고등어 5000원..."

오늘도 나는 쪼개고 쪼개 쓴 돈을 가계부에 적는다.  뚜벅뚜벅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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