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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Jan 15. 2021

길위에 서 있는 사람들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이야기-


오랜만에 영하에서 허덕이던 기온이 영상을 회복했다. 창밖으로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잔풍한 날씨다. 그녀가 오늘은 나왔을까. 며칠 전부터 유난히 고추장 더덕무침을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기다렸지만 영하의 강추위는 그녀도 어쩌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 같이 좋은 날을 부지런한 그녀가 그냥 보낼 리 만무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역 주변에 있는 작은 노점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 노점은 할머니들이 텃밭에서 기른 상추나 고추, 감자, 호박 등을 가져와 판다. 은근히 싸고 좋은 물건들이 많아 주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노점은 봄부터 늦가을 동안 이어지다 이듬해 봄에 되면 그때 다시 장이 선다. 하지만 그녀만은 겨울에도 터줏대감처럼 굳건히 그곳을 지켰는데 연일 이어지는 강추위는 그녀가 지켜온 아성까지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사거리 건널목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그녀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향기다. 은은한 듯하면서도 진한 항기를 담고 있는 우리에게 친숙하고 오랜 된 향기다. 멀리 안경점과 은행을 뒤로하고 양지바른 곳에 넓은 박스 위에 좌판을 벌이고 앉아 열심히 더덕을 까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반가움이 내게로 와락 달려든다. 


그녀의 칼질에 따라 거무튀튀한 겉껍질이 벗겨지고 뽀얀 속살이 드러난 더덕들이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벌써 박스 안에는 팔려나간 더덕 개수를 알려 주기라도 하듯 껍질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녀가 부지런히 사용하는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는 듯하다.          


"오랜만이에요. 아주머니 더덕 한 봉지 주세요."     

"날씨가 춥다고 딸이 못 나가게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 못 나왔네요."     

수줍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씩 웃는다. 그녀만의 인사법이다. 깐 더덕을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아 내게 건넨다. 쩍쩍 갈라진 그녀의 손등과 굳은살이 베긴 엄지손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하는 칼질과 영하의 추운 날씨는 그녀의 손에서 등고선 같은 무늬를 지웠다. 지운 그 자리는 고된 노동의 등고선이 간격과 방향을 잃고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순간 어두운 밀실에 모여 무수히 많은 시간을 누군가를 사기 치기 위해 전화번호 숫자판을 달리고 있을 음흉한 손들이 떠올랐다. 그 손은 평범한 회사원을 극단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오늘 오전에는 딸 친구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했다.  그들은 한치에 오차도 없이 인터넷 기사나 뉴스에서 나온 것처럼 자기가 중앙지검 형사나 검사인 양 행세를 하며 검은 마수를 뻗쳤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막상 당하고 보니 당황해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그들이 하는 대로 순간 끌려갔다는 딸 친구의 말이 자꾸 가슴에 걸려 묵직하게 남는다.  


 오늘도 그들은 어디선가 노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거기에서 오는 뿌듯함을 느껴 보려 하지도 않고 소리 없이 검지라는 칼날을 전화 번호 숫자판 위에서 휘두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띵디디띵띵~띵띵 띵"     


그녀의 전화 소리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나를 깨운다.     


"할머니! 거기 어디야? 엄마가 전화해서 바꿔줬어."     

" 에구! 내 새끼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할머니가 저녁에 맛있는 과자 사서 갈게요."          


화면 속에 귀여운 손녀는 할머니에게 연신 키스를 손으로 날린다. 늘 더덕을 까느라 머리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얼굴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순간 그녀 주위로 더덕 향기를 품은 따스한 겨울 햇살이 잔잔하게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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