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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Oct 23. 2019

#11. 성자가 된 테판이

열 번째 날 : 산토도밍고 데 칼사다에서 벨로라도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Camino de Santiago)] 

D+10 산토도밍고 데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벨로라도(Belorado)까지 23km


 새벽 5시도 안돼서 눈을 떴다. 카미노 길 내내 난 알람시계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냥 눈뜨고 싶을 때 떠서 출동하기로 처음부터 맘을 먹고 알람 따위는 설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새벽부터 눈만 잘 떠지더라. 평소엔 아침 9시가 넘도록 밍기적거리는 것이 특기인데, 순례길에서는 요상하게도 새벽마다 눈이 잘 떠졌다. 평소엔 전쟁이 나도 모를 정도로 잘 자는데, 이상하게 까미노에서는 누군가의 사부작 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깼다. 한 바퀴만 구르면 옆 침대로 옮겨갈 수 있는 다닥다닥 한 침대 구조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고, 코골이꾼들의 소음 소리는 참을만한데, 코골이의 진동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또한 카미노 이후로 악몽을 많이 꾸기 시작을 했다. 악몽이라고 해봐야 '블랙호크 다운'이나 '플래툰' 혹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전쟁영화 속 군인이 되어 전쟁터를 누비는 것 아니면, 쫓겨 다니거나 도망 다니는 꿈이 전부이지만 근래에 안 꾸는 꿈이라 의아했고, 꿈속에서 마저 뛰어다니거나 쫓겨 다녀서 잠을 자도 피곤했다.

새벽 5시에  눈을 뜨고는 도저히 다시 잘 엄두가 나지 않아(사실은 화장실을 가고 싶었는데, 이 층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하기 귀찮기도 하고) 일어나서는 조용히 짐을 들고 방에서 나와 복도에 살림살이들을 풀었다. 씻고 먹고 출동 준비를 끝내고도 새벽 6시가 안되었기에 식당 탁자에서 밀린 일기를 썼다. 

 하나둘씩 떠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젯밤의 재스민의 행적을 아는 독일 사내아이가 얼정 거리를 것을 목격했다.

"재스민 어떻게 되었어?"

"지난밤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몰라, 아무래도 본국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 싶어"

"아이고, 어쩌냐? 테판이는?"

"같이 병원에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지난밤 앰뷸런스까지 동원되었으나 요란하지는 않았던 작은 소동의 주인공이 바로 재스민이다. 



사건을 진상을 알기 위해서 다시 시간을 어제로 돌려야겠다.

어제 내가 시내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담배 쟁이 스테판을 목격했다. (까미노에서 만난 스테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한 트럭이 되니 구별을 위해 담배 쟁이라는 호를 붙인다)

 당시엔 담배 쟁이 테판이가 광장의 야외 식당에서 한 여인네와 맥주를 마시며 있었는데 그 여인네의 이름이 재스민이다.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아는 체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독일에서 왔고, 태판이는 오스트리아(캥거루의 나라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독일 옆 나라)에서 왔기에 둘 다 독일어로 떠들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 뻘쭘하게 끼고 싶지 않았고 더군다나 둘이 뭔가 분위기가 따끈하게 좋았기에 더더욱 모른 체했다. 청춘 남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만큼 나는 눈치 없지는 않다. 

 그리고 어젯밤 그들을 다시 본 것은 알베르게 식당 옆 한 코너에 있는 소파였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태판이에게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있는 재스민을 목격하고는 난, 그들이 벌써 진도를 뽑기 시작한 것이라 착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목격했던 그 광장에서 그녀는  돌에 맞아 뇌진탕을 일으킨 것이다.

'참 재수도 없다' 혹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을  여기다 쓰나 보다.

혹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던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다'는 말은 분명 누군가의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재스민이 겪은 사고도 그런 종류 중의 하나이니깐.


 광장의 수많은 새들 중에 한 마리가 훨훨 날다가 건물 옥상에 잠시 내려앉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날아오르려고 하는데, 삐끗해서 기왓장 하나를 잘못 밀어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기왓장은 지붕을 타고 비스듬히 쓸려 내려와 지붕 끝 지점에서 중력의 법칙을 받고 반듯한 직선을 그리며 자유낙하를 하였다.  

목표지점은 바로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피자를 먹고 쉬고 있던 재스민의 머리... 

"깡!!"

그녀는 그렇게 하늘에서 낙하하는 돌을 맞았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그녀는 끝내 온몸이 풀려버린 것이다. 어쩜 피가 나지 않아 더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구급차의 구조대원을 불렀고,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한걸음 한걸음 다리를 옮기며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테판이도 같이 갔다.

그리고는 밤새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걱정을 하면서도 한탄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카미노를 끝내는 일이 누군가에겐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렵기까지 했다.





아침 7시간 다 되어서 다른 순례자들을 깨우는 소음에 나도 길도 나섰다.

얼마간 걸어 나타난 마을 그라뇬의  한 카페테리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 카페에서는 재즈음악이 크게 흘러나와 상쾌한 아침 공기에 상큼한 향기까지 보태어서 아주 기분좋게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때, 재스민이 씩씩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가서 끌어안고는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응, 아주 좋아. 병원 갔다가 푹 쉬고 나오니 훨씬 좋아졌어"

"운이 좋았네"

"그게 운이 좋은 거냐? 하늘에서 떨어진 돌에 맞았는데. 그곳도 광장에 앉아있다가."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난 게 운이 좋은 거지. 집에 안 돌아가도 되겠어?"

"응.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응, 그래 넌 아주 강한 애니깐 잘 해낼 거야.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활력이 넘치는 그녀는 그래도 느린 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참의 휴식을 마치고 마을을 벗어났을 때 태판이가 피로한 몸을 이끌고 앉아있는 게 보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다. 영혼 빠진 그의 자태는 '달리'의 그림처럼 벤치에 녹아내릴듯했다.

"태판아 너는 괜찮아?"

"응. 괜찮아"

"재스민은 아까 먼저 씩씩하게 걸어가더라"

재스민이 먼저 걸어갔다는 말에 그 녀석의 얼굴에  원망과 체념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허망함이 그의 회갈색 눈에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난 저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고난을 딛고 일어난 재스민은 해냈다는 쾌감과 함께 에너지가 솟아나지만 간호를 한다고 걱정으로 밤을 꼬박 뒤척인 태산이는 정말 기가 쫙 빠진 상태일 것이다.

그런 그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정작 피곤하고 힘든 것은 고난을 이겨낸 그녀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고 이끈 태판이라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태판이의 공허함을 알고도 남는다. 그런 그를 위로해 주는 것이 뭔지도 안다.

초.코.파.이

당이 떨어진 것 같아 지난밤에 사둔 초코파이를 그에게 건넸더니 그제야 빙그레 웃는다

계단을 내려오며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넋 나간 얼굴로 초코파이를 먹고 있었다


.

 그는 며칠 전에도 까미노 길에서 한 여인을 간호한 적이었다. 카미노 초반 피레네를 넘을 때, 무리한 산행으로 인해 경기를 일으키고 쓰러진 여인이 있었는데, 그때 지나가던 태판이가 그녀를 간호해준 것이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었는데 말이다.

태판이는 한 번도 이런 일을 남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나,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그 당사자인 여인네가 나에게 고해성사처럼 이야기해줬기 때문이다.



까미노에서 누구나 한 번쯤 수호천사를 만나기도 하고 되어주기도 한다.  나도 만나봤지만, 내가 되어본 적은 없다. 기껏해야 내가 한 일이라고는 사람들 웃겨주고, 술 사주고, 잊고 두고 간 스틱 주어다 다음 마을에서 찾아주고, 두고 간 물병 주인 찾아주겠다고 들고 간 것뿐이다. 

그런데, 테판이는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래서 난 이 이후로 담배 쟁이 테판이가 아니라,  성자(Saint) 테판이라 불렀다. '세인트 스테판'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부끄러워했고. 그의 선행을 알려지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더 이상 담배 쟁이가  아닌 성자 태판,  세인트 스테판이다. 













 중간에 귀염둥이 삼총사 중에 한 명인 환이를 만나 같이 걸었다. 걸음 속도가 나와 딱 맞은(맞혀준 것일 수도) 귀여운 이 녀석은 세계 일주를 하러 나왔고, 그것 때문에 돈 모으니라고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게다 인대 부상으로 다리에 철심까지 박았는데 이리 씩씩하게 걷고 있으니 대견하고 기특하다.




벨로라도 성당 내부


순례자 정식 식사




뒷동산에서  내려다본 벨로라도


 환이와 함께 수다 떨며 노래 들으며 도착한 마을은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

작지만 이쁜 마을이다. 이곳에서 먼저 온 귀염둥이 삼총사 이 인방과 합세했고, 나중에 두 언니들까지 만나 같은 알베르게에서 지냈다.

 원래는 요리를 하려고 했는데, 일요일이라 슈퍼마켓의 문이 닫힌 관계로 순례자 정식으로 식사를 했다.

아주 간결하고 깔끔한 맛으로 여태 먹은 순례자 정식 중에 제일 맛있었다, 아마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해서 그런 것 같다.


저녁을 먹고는 뒷동산에 올라 석양을 보려 했으나, 이런 밤 9시가 넘어도 환하다. 

 게다 2주 전부터 써머타임이 적용된 탓에 해가 더 길어졌으니 매번 석양 보기는 글러 먹은 것 같다. 허긴 일출은 원 없이 보니 그걸로 퉁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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