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생각하는 효도.
시작은 이러했다.
일본 여행 가자고 하면 같이 갈 마음 있어?
카톡으로 딸이 제안했다.
물론이지, 엄만 무조건 콜이야.
뜬금없고도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뭔가 석연찮은 신호도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속내를 숨겼다. 대신 너와 함께라면 지옥도 콜~ 을 외칠 것 같은 흥분된 어조로 대답했다. 이어 어쩜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했냐고.. 가식이 가려진 흥분된 감정만 음성지원되길 바랐다. 그러나 딸과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대화가 끊기자 두뇌 회로에 빨간 불이 켜졌다.
옅어지긴 했지만 내 의식 속 어딘가에는 삼척여행이 딱지로 남아있다. 삼척은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생으로 씹는 약초 맛이 나는 여행지다. 그리고 약초 맛은 일본과도 연결된다. 왜 하필 일본이지?
두해 전, 삼척여행을 끝내면서 딸은 엄마와 단둘 여행은 삼십 년 후에나 생각해 볼 문제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댁 가족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딸의 일본여행은 삼척에서 받은 상처에 소금이 뿌려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망망한 기분에 빠졌다. 며느리로서 딸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해도, 아픈 내 마음이 갱년기 증상 중 하나라고 몰아붙여도 상관없었다. 어찌할 바 없이 허망했고, 가슴에선 모래 알갱이가 서걱거렸다. 모래는 서로 비비적거리며 미세하고 오랜 아픔을 만들었다.
그때 내 심리가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누구도 편치 않았고 특히 친구들을 만날 때 감정을 감추느라 힘들었다. 친구들은 모임마다 축하소식을 가져왔다. 장학금, 취업, 결혼이라는 사연이 한 순배 돌고 난 이후 연봉과 근무 환경이 바뀐 자녀의 이직을 물고 왔다. 와중에 첫 손주를 본 친구가 냉큼 밥을 샀다. 나는 평화로운 얼굴로 밥을 얻어먹었으나 의지와 상관없는 말들을 뱉었다. 아차 싶은 말들, 후회하기에 늦은 말들, 유독 나만 딸과 틀어졌다고 느끼며 홀로 소외되었다. 대나무 숲이 절실했다.
나는 페이스 북을 활용하기로 했다. 딸 또래들이 기웃거리지 않으니 안전할 것이라 판단했다. 페이스 북에 있는 과거의 오늘이란 기능이 있다. 오늘 기록은 가깝고 먼 미래에 과거의 오늘이 될 것이다. 지금 느끼는 서운함을 미래에서 재회한다면 마음이 어떨지 궁금했다. 1년 뒤에도 여전히 아플까? 설마 5년 뒤에도?
페이스 북이 회상시키는 과거의 오늘은 생생히 떠오르는 그날이기도, 아무 감흥 없는 무색의 날이기도 했다. 시간이 퇴적된 과거 대부분은 그땐 그랬지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현재 감정이 아무리 형형색색으로 펄떡거린 들 끝내 흑백으로 귀결될 터였다. 지금 내 서운함에도 빠져야 할 색이 있을 거였다. 나는 글을 볼 수 있는 사람명단에서 딸을 제외시킨 뒤 내 감정을 여과 없이 털어놓았다.
딸의 카톡을 받았을 땐 안전장치를 의심했다. 페북을 보고 일본 여행을 제안한 건 아닐까. 딸은 이런 방식으로 화해를 요청하나 싶었다. 딸의 속은 깊었다. 엄마인 내가 느낄 정도로. 하지만 빗나가는 타이밍은 어쩔 수 없었다. 딸에게 속내를 들켰다는 가정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대 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고 예측이 틀렸다면 더 큰 낭패를 겪을지도 몰랐다.
사위는 괜찮다니?
나는 딸의 옆구리를 찔러 심리전을 펼쳤다.
아직은 내 생각일 뿐이야. 의논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 게.
우회적인 심리전으로 사위가 동행하는 자유여행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갈지 결정할 차례였다.
후쿠오카 어때?
딸이 제안했다.
좋아. 내가 대답했다. 지난 경험을 토대로 무조건 딸 의견에 따르기로 작정한 마당이었다.
2023년 겨울 체감 경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자영업을 유지하는 동안 이렇다 할 호황은 없었지만 2023년을 겪으니 지나간 시절이 호황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주말 거리로 나섰고 나는 텅 빈 매장에서 마음을 쓸어내렸다.
나의 고민은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버티나였다. 우울감으로 살기엔 긴 시간이었다. 마음을 뺏길,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쓰이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빈 매장에서 글을 쓸 때만큼은 애간장이 녹지 않았다. 정산의 때가 오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을 태웠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글을 만드느라 무감했다. 텅 빈 매장이 무념의 상태가 되기에 적합했다. 나는 글이 풀리지 않을 때 한 동안 멍한 상태로 있는다. 빈 머리에 불현듯 특정 단어나 생각이 떠오르면 그 코를 잡고 글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의 카톡을 받은 날도 글이 써지지 않아 여행지를 검색했다. 한참을 검색하던 나는 딸에게 링크를 보냈다. 그리고 십분 뒤 또 다른 링크를 보냈다.
첫 번째는 후쿠오카 자유여행 링크고 두 번째는 방사능 오염의 심각성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었다.
얘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무조건 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던 작정은 사라지고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사실 시댁 가족과 일본행이 기막혔던 이유에는 질투도 있었지만 방사능 사고도 걱정되었다. 딸은 방사능이 유출된 사고 직후 일본에 치를 떨었다. 그랬으면서 불과 몇 년 만에 딸이 내린 결단이 이해되지 않았다. 시댁과 동행이면 자기 기준을 그렇게 쉽게 흐려도 되는 건가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잠시 후 딸은 후쿠오카와 후쿠시마에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한 지도를 보냈다. 내가 두 지역을 헷갈리고 있다는 지적이었지만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는 괜찮아, 그런데 너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모체잖아. 아무래도 후쿠오카는 피하는 게.. 블라 블라. 혀를 길게 빼고 장문의 문장을 적었다. 그러다 문득 잔소리를 지우고 통화할까?라는 네 글자만 보냈다.
대만, 보라카이, 세부 그럼 이중에 한 곳을 골라 봐. 딸은 내 걱정을 받아들였고 우리 여행지는 대만으로 결정되었다. 여행지가 결정된 뒤 나는 대만 정보를 검색했다. 그러다 날씨에 꽂혔다. 여행의 기본은 날씨가 반이고 마음 맞는 동반자가 나머지 반을 채우는 즐거운 이벤트다. 그런데 우리가 여행하는 4일 내내 대만에 비가 온단다.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래서 다시 카톡을 보냈다. 비가 온다네. 대안으로 홍콩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