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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Sep 14. 2024

효도여행이라니 일단 감사 - 2

인천공항에 모인 사람은 서른 명이 조금 넘었다. 그중 일가족 11명 단체 팀과 친구 사이로 보이는 사십 대 후반의 여자들이 눈에 띄었다. 여행 내내 여자들의 높아진 흥분지수를 목격했다. 여자들은 가끔 딸에게 핸드폰을 내밀며 흥분 기록을 부탁했다. 딸은 그때마다 여자 친구를 찍는 남자 친구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어리광을 부렸다. 엄마도 그렇게 찍어줘. 저 사람들은 한 번 이잖아. 딸은 1초의 말설임도 없이 돼 박았다. 딸의 반응에 1초의 망설임 없는 후회가 달려들었다.


여행 중간에 내가 물었다. 이번 여행 명분이 뭐야. 

홍콩을 꺼냈다가 초치기 왕이냐는 퉁박을 받은 나는 기죽은 상태로 여행길에 따라나섰다. 은근히 기대했던 화해 제스처도 없고 이것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금기 사항만 가득인 여행이 솔직히 불만스러웠다. 효도여행이야. 내년에 엄마 환갑이잖아. 근데 내가 임신 계획 있어서 그전에 미리 온 거야.


막상 도달해 보니 환갑이 축하받을 일인지 의문이 든다. 오래전 내 부모들의 뻑적지근한 회갑연은 그 나이까지 살아남았음을 알리는 승전고였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환갑은 고립감만 더해지는 나이인 듯싶다. 나는 실망이 기대의 소산이고 선을 넘으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는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면 우선 기대를 버리고 미처 떨치지 못했다면 들키기 전에 조용히 떼내는 수련에라도 들라며 나를 담금질한다. 그런 마당에 무슨 이유를 들어 환갑 북을 올려야 할까. 이번 여행이 기념 선물인 걸 미리 귀띔했다면 차라리 혼자 오겠다고 했을 것이다.   


효도여행, 모르고 따라온 여행이었다. 떠나오기 전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행 중 엄마가 삼가 줬으면 하는 말이나 행동 한 가지만 말해 봐. 영문도 모르고 받는 깜깜이 퉁박으로 어리둥절 멍청해지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원하는 방향대로 맞춰주는 게 최대의 배려라면 싫어하는 걸 삼가는 건 최소의 협조다. 딸은 자신을 모델로 과도한 사진 찍기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노인 취급 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효도여행이란다. 효도여행에 나를 이렇게 대한다고? 사전에 당부한 노인취급은 유치원생 대하듯 금지사항의 나열이었다. 나의 당부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의사를 배제하는 게 요즘의 서프라이즈인가?


여기 서 봐, 잠깐만 저기도 예쁘겠다! 포토라인마다 자신을 세우는 평소의 엄마가 피곤했다며 제한을 요구했던 딸은 내게 스폿에 세우지도 포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딸은 중년 여자들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세상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인생샷을 과감히 포기했다. 딸의 웃음처럼 너그러운 포기였다.


어느덧 여행 마지막날 밤이었다. 나의 인내력을 치하하며 잠자리에 들렸는데 딸이 자기들 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같이 맥주를 마시자는 딸은 과자 몇 봉을 뜯어 안주를 마련했다. 우리는 캔 맥주 건배를 한 후 여행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그러다 딸이 내게 냉장고에서 물 좀 꺼내오라고 했다. 물을 꺼내 돌아온 자리에 카스텔라에 꽂힌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꽃보다 고운 우리 엄마. 세 번째 스무 살을 축하해요.


생일 케이크 문구를 보고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엄마. 그때도 딸이 준비한 케이크에 적힌 문구였다. 대학생 딸은 그때까지 내게 의존도가 높았다. 나는 케이크 문구에서 딸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터진 것이다. 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그때의 엄마를 떠올렸을까? 사위와 딸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기쁨을 연기했다.


딸이 결혼한 이듬해는 바깥사돈이 환갑이었다. 그때 딸의 선물은 시댁식구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했다. 뽑아도 뽑아도 계속 올라오는 오만 원권 지폐의 릴레이 카드. 그 말을 전하지나 말던가. 제대로 된 케이크도 아니고 카스텔라에 달랑 문구만 올린 카드를 보니 서운함이 고개를 들었다. 일본 카스텔라에 이은 대만 카스텔라. 딸이 준비한 효도여행이 내게는 카스텔라의 슬픈 추억을 재연하러 온 기분이었다. 진작 포기했던 기대에 바람을 넣더니 둥실 떠올랐을 때 공기구멍을 여는 느낌. 감흥이 빠져나간 여행이었다.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대만여행에서 그나마 기대했던 장소는 바닷가 지질 공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기암괴석이 그곳 바닷가를 유명 관광지로 만들었다. 특히 사람 얼굴 형상으로 깎여나간 바위에 사람들이 주로 몰렸다. 나는 인증샷 행렬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장소에서 화보 사진을 포기해야 하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만약 친구들과 함께 왔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나는 여행 재미를 까부는 맛에 둔다. 타인에게 맞춰진 가면을 벗는 시간이 여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활권을 벗어난 여행지에서 나는 서슴없이 가면을 벗는다. 가면을 벗으려면 마음 맞는 동행자가 기본 조건이다. 샤랄라 원피스, 화려한 스틸레토, 선글라스와 과감한 장신구를 착용한 내 모습이 동유럽 골목길과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확인한 친구들은 차츰 자신들의 여행복장을 바꿔나갔다.


지질 공원을 돌아보고 나올 때 딸을 발견한 여자들이 다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녀들은 손을 맞잡고 인간 띠를 만들어 만세 포즈를 취했다. 사진이 찍히자 다음에는 제자리 점프를 했다. 젊네. 핸드폰을 돌려주고 돌아온 딸이 말했다.


노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대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다. 학부모로서 긴 임무를 마친 시간. 그녀들은 지금 인생 황금기를 지나는 중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도 친구들과 여러 곳을 몰려다녔다. 엄마 인생에서 황금기는 길어봐야 10년이다. 10년 뒤 저들도 나처럼 호기심이 고장 난 나이를 만날 것이다. 행여 호기심이 살아 있다한들 건강이나 손주 양육등 각각의 사정으로 뭉쳐 다니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딸의 눈이 나와 다른 것은 너무 당연했다.  


새해 첫날, 나는 사위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 내가 좋아하는 남한산성을 찾았다. 잔설을 둘러쓴 두시의 남한산성은 마치 여행지 같았다. 드라이브와 점심과 차. 딸을 결혼시킨 후 사위 대동하고 함께 여유를 부리는 그림이 내 버킷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에 한가한 남한산성이 그렇게 느껴진 거다. 딸의 말투도 전에 없이 살가워서 하루종일 마음이 몽글거렸다. 내 집 근처로 왔을 때 딸이 인생 네 컷을 찍자고 했고 결과불을 받아 든 딸은 그날 내 기분의 방점을 찍었다. 우리 엄마 아직 젊네


불과 두 달 전에는 엄마를 젊게 보더니 다른 여자들 곁에선 엄마가 갑자기 늙어 보이는 걸까? 여자들을 향해 젊네.라는 딸의 평가가 두서없이 씁쓸했다. 그럴 나이지.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단다.라고 일깨워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구글 포토를 열어 딸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8년 전 여행지 사진들을 보여주며 여행지를 어떻게 씹어 먹었는지를, 불과 5년 전만 해도 화보집 한 권 정도는 가뿐했다는 걸 확인시키려 했다.


여자들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저 여자들처럼 활기 넘쳤던 시간은 겨우 5년이 지난 지금 큰 차이를 만들었다. 노인의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랬네. 딸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중년의 5년을 가름하지 못하는 어린 딸. 확연히 나이 든 지금 모습으로 그녀들과 비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듯 심드렁한 딸의 반응에 다시 한번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딸이 물었다. 첫날 앉은자리가 고정석이 된 버스에서 통로를 사이에 둔 딸 옆자리에는 11명 가족팀 중 아버지와 딸이 앉았다. 뒷 문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첫자리에 앉은 아버지는 70대 후반, 딸은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딸은 여행 기간 내내 아버지가 앉은 휠체어를 도맡아 밀었다. 버스 짐칸에 있던 아버지의 휠체어는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같이 타고 같이 내렸다. 스스로 몸을 제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아들인지 사위인지 모를 건장한 남자 둘이 휠체어에 앉혔다. 그들 일행 중에는 손주들로 보이는 젊은 아이들도 셋이나 되었다. 그들은 할아버지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아내로 보이는 늙은 여자도 남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곁에 앉은 딸이 여행 도우미인 줄 오해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매일 다른 옷으로 말끔하게 갈아입었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패션감이어서 돈 많은 아버지가 가족여행 경비 일체와 도우미까지 붙여 가족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였나 보다 생각한 거다. 그런데 가까이서 지켜보니 도우미가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걸 보고  내 추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알아차렸다.   


딸의 질문 요지는 저런 상태로 여행에 따라오는 게 맞느냐는 거였고 사위는 모시고 오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둘의 상반된 의견에 대해 생각 헸다.


여행이 끝나고 버스가 우리를 공항으로 데려갔다. 가족팀이 제일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늙은 남자를 부축하러 오던 남자 중 한 사람이 즐거웠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가시고 행복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자식들과 여행 추억을 쌓고 싶은 마음을 노인 욕망으로 읽는 딸, 그리고 딸이 주는 내 환갑 선물 효도 여행.   

       

짧은 여행 상황으로 그 댁 사정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를 비춘 반영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빠져주면 자식들이 고생을 덜 하지 않겠냐는 딸의 생각. 아버지가 원하면 모시고 오는 게 마땅하다는 사위 생각. 건강관리 잘해서 가능하면 혼자 다녀야겠다고 다짐하는 내 생각. 가족이라 해도 생각이 일치하진 않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우리 셋은 인천공항에서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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