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필적 글쓰기 May 06. 2016

출산장려운동 2016

월리가 쉽게 찾아지는 나라에서

 



 이야기가 잡다해 이 맛도 저 맛도 못 갖고 뒤숭숭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5월 2일. 이상기온인지 이상 체온인지 판단이 안 서는 한 낮이었다. 서울의 낮인지 방콕의 낮인지도 변별이 어려웠다. 여하간 엄청 더웠다. 오후에 더위를 식힐 비가 온대요, 라는 소식으로 고진감래를 상기했지만 당장의 쓴 더위엔 다가올 비도 달지 않았다. 집 그늘에 숨어있으면 딱 좋은 그 낮에, 하필 일주일 전 잡아놓은 점심 약속이 있었다. 드물게 만나는 친구라 다음 기약이 아쉬웠다. 다음번의 그 낮도 한여름일 테니, 어차피 더울 테면 여름 낮보단 봄 낮이 수월하지, 라는 단순한 비교우위로 나갈 작정을 했다. 더웠다.


 사실 나는 더운 와중에 아침으로 더운밥까지 꾸역꾸역 해치운 터였고(아침밥은 목숨이 아닌가), 친구도 그랬단다. 냉모밀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생맥주가 2천5백 원이었다. 시켰다. 다른 건 아니고 더워서 시켰다. 스무 살 초입에 친구들과 공강 시간을 메울 거리로 맥주를 마시긴 했는데, 그마저도 흡연구역으로도 매력 없는 오지에서 홀짝대는 수준이었다. 정오 맥주는 처음이었다. 으으. 뭔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된 느낌이었다.(ㅋㅋㅠ.ㅠ) 


  친구와의 대화는 바닥 위에 엎지른 물 같다. 컵이 속절없이 방류한 물은 흐르고 기어서 소파 밑으로, 에어컨 밑으로, 진열장 아래로, 부엌 쪽으로 진출한다. 부엌으로 가는 물 뭉텅이의 앞길을 탁 막으면 옆으로 옆으로 안방을 향한다. 말이 길었다 뿐이지 대화 주제의 정해진 향방이 없단 뜻이다. 어쩌다 얘기는 출산까지 튀었다. 미혼 여자 둘이 나가도 너무 나갔지만, 다섯 살 꼬마한테 "어느 대학 갈래?"묻는 어른도 있는 세상에 이 정도면 준수한 '서부렁섭적'아닌가... 뭐 결론은 비관으로 맺어졌다. 낳기도 무섭지만 키우기가 더 두렵다는 게 요지였다. 친구와 헤어진 때부터 비가 살살 내렸다. 
 
 

 "개혁 없는 성장 없다!"
잃어버린 과거를 벌겠다는 총리의 열망은 과연 뜨거웠다. 2001년부터 내리 3대 총리를 지낸 일본의 고이즈미는 90년부터 훅 꺼져버린 일본 경제를 정상 궤도에 재진입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개혁'을 내세웠다. 전체 공무원 28%의 젖줄이었던 우정성을 민영화했고 기업 규제 철폐와 창업 장려 제도를 신설했다. 이 결과 2006년 일본은 1966년부터 1970년 전후 일본의 최대 호황기였던 이자나기 경기 이후, 최대 경제 성장을 이룩해냈다. 숫자는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산수와 민심은 멀었다. 기록적인 경기 진작이었지만 실제 민생은 호황을 몰랐다. 당시의 일본은 '일 할 놈 없는' 인구절벽에 부딪혀 시름겨웠기 때문이다. 개혁으로 공들인 탑을 꾸준히 가꿀 사람이 부재했다. 일본은 저성장의 수렁에 되빠졌다. 그렇게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은 20년으로 장기화됐다. 
(참고 :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김현철, 다산북스)




 붙어살면 닮는다고 그랬다. 일본의 악재가 우리에게도 옮겨 붙었다. 우리의 생산가능 인구는 올해 최대수를 찍고 당장 내년부터 꾸준히 곤두박 칠 거라는 암암한 계시를 받았다. 10명의 장정이 들던 백지장을 5명이 들어야 하는 사회로 돌진하고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저성장' 확진 판정을 받은 우리 경제에 인구절벽은 가혹한 액운을 뜻한다. 사람은 경제 추동의 주체다. 돈은 스스로 벌리거나 쓰이지 못하고 인간의 형형한 신체에 빌붙어 유통되기 때문이다. 돈을 쥘 손과 옮길 발이 없으면 규제는 말장난이 되고 개혁은 고사故事의 신화가 된다. 절체절명의 오늘에도 신생하는 아이는 없다. 분만실은 고요하다. ABCD만큼 지겨운 OECD를 들먹여 보자면, 우리나라는 해당 국가들 중 출산율 꼴찌라는 오명을 이미 우리의 실명처럼 빈번히 불린다. 사탕 막대보다 불에 탄 꽁초가 몇갑절로 흔해질 것이다. 방한한 월리(월리를 찾아서의 그)는 인파에 숨기보다 건물에 피난드는것이 더 유리한 사회 말이다. 2030년의 미래상에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건 베타고와 감마고의 등장이 아닌 생산 가능 젊은이의 절멸이다.  


 안다. 액운을 땜하기 위해선 출산 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린 2차 관문과 마주한다. '저성장이고 나발이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현실'의 성벽은 굳다.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버이 은혜가 이룩되기 위해선 자녀 한 명에게 학사 졸업장 쥐어주기까지 2억 6천만 원이 요구된다(정말인가요 엄마?). 순수 양육비 추산만 이렇다는 것이다. 주장보단 구걸에 가까운 남녀 육아휴직과 이후 감당해야 할 경력단절은 어림셈도 어렵다. 아이는 낳으면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부모의 희생과 더불어 사회의 뒷받침이 아이를 기른다. 그러나 사회가 나몰라라 발 뺀 사회는 부모에게 출산을 강요할 수 없다. 무턱대고 '경기 부양할 인구를 낳으라'는 요구는 헌 집 줄 테니 새 집 달라는 모진 딜 deal보다 허황하다. 



 아이를 낳고 싶은 사회가 되면, 출산율이 증가하고, 자연히 인구 절벽을 허물 수 있다. 이는 정치의 효용이 서고 규제와 개혁을 이끌 동력이 재가동됨을 뜻한다. (효용 일지 무용 일지를 결정할 정치의 성질도 당연 중요하겠고.) 당장 돈을 풀어 마른입을 적시고 인적 구조조정을 통해 매캐한 말직의 노동을 정리하고, 규제를 풀어 기업 사재를 든든히 하는 건 찰나의 변통이 될 순 있다. 지근거리나 밝히는 후레쉬 불빛 정도나 될까. 이 빛은 먼 어둠에 닿지 못한다. 일본의 벅적할만한 경기부양이 조용히 사그라든 과거가 알려준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아도 마실 '사람'이 없으면 말짱 황이다. 인구가 경제의 유일한 키!라는 허황된 주술이 아니다. 그러나 경제의 기틀이다. 기틀 없이 서는 건물 없고, 노류路柳도 뿌리 없인 돋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 낳고 싶은 사회'는 저성장이 고뇌해야 할 중추다.  




 저성장 제놈이 이 사정 저 사정 곡진히 보살핀다 하더라도 결국 아이를 낳는 건 사람일진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얼러야 할까. 

"언니는 둘째 안 낳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하나마나한 말을 묻고야 말았는데,
대답은 뻔했고,
"그럼 어떻게 하면 낳고 싶을 것 같아?"

"휴.."
의 그림자만 길게 누웠다.


동생이 언니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힘내'라는 말은 벌써 낳은 아이 힘써 기르라는 건지, 미래에 올지 모를 아이 힘써 낳으라는 건지 모호해 하지 않았고.
기름 떼 슬은 저녁 설거지나 하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학대 게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