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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pr 20. 2024

메이크업 모델

2023.09.30.토요일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인데 이런 날은 꼭 눈이 일찍 떠진다. 참 신기하다. 좀더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었으나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해져서 그냥 일어났다. 오늘 오전에는 집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는  예리코 해변으로부터 이어지는 해안가 산책로를 걸어가볼 예정이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남서쪽에 위치한 해변인데 거기서부터 쭈욱 해안가를 따라 트레일이 형성되어 있다. 예리코 해변에서 서쪽으로 좀더 가면 UBC라는 거대한 대학 지역이 나온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대쯤 되는, 브리티쉬 컬럼비아 주에서는 꽤 유명한 대학이다. UBC에는 로즈가든이라는 작은 정원도 있는데 저번에 밋업의 영어회화 모임에서 만난 사람이 추천해주었다. 작지만 바로 앞에 전망이 아주 근사하다고 했다. 장미가 아직까지 피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가보려고 한다. 간 김에 그 옆의 니토베 기념 정원도 가볼까 한다. 니토베는 일본의 경제학자인데 꽤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캐나다에도 공헌한 바가 크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서 여기에 기념 정원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학자를 보려고 하는게 아니라 이 정원이 일본식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는, 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일본 정원이라고 해서 한번 가보려고 한다. 입장료가 있다는데 뭐 상황을 봐서 결정하자.


아침을 먹고 슬슬 출발했다. 기온이 제법 쌀쌀하지만 해가 있는 구간은 따뜻하다. 이제 곧 비가 계속 오는 레이니쿠버 시즌이 되므로 해가 있을 때는 무조건 돌아다니는 것이 좋다. 버스로 30분 정도 가서 예리코 해변 근처에서 내렸다. 해변 바로 옆에는 로열 요트 클럽이 있는데 요트 경치가 멋질 것 같아서 가보았다. 요트도 멋지지만 나에게는 그 옆의 자연친화적 놀이터가 더 근사해보였다. 놀이터의 바닥이 나무 껍질들이고 곳곳의 구조물들이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놀이터가 아주 마음에 든다.




놀이터와 요트 클럽을 지나 예리코 해변을 걷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볼이 너무 시리다. 나름 잔머리를 써서 해를 등지고 걷는 동선을 잡았는데 대신 맞바람을 맞으면서 걸어야 한다는 것은 몰랐다. 햇볕을 정면으로 보면서 걷는 불편함을 피하려다가 역풍을 맞았다. 역시 인생이란 이렇다. 한가지를 피하면 다른 장애물이 나타나지.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해안가 풍경은 너무 멋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트와 카누를 즐기는 것을 보았다. 참 대단한 열정들이다. 막바지 여름 스포츠를 즐기느라 다들 신나보인다. 그래. 더 추워지면 물에 못들어갈테니까 지금이라도 많이 즐겨라. 한쪽에서는 발리볼을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캐나다 구스들이 떼지어 돌아다니고 있다. 참,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여기에 갈매기 한 마리가 나를 위해 폼을 잡아주고 있어서 멋진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해변의 나무 둔치에 앉아 있는 나의 뒷모습도 찍어 보았다. 타이머를 맞추고 대략 위치를 잡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진을 건졌다. 이런 저런 사진을 찍느라 걸음을 더 느려진다. 바람에 맞서 열심히 걷다보니 해변 이름이 바뀌었다. 스패니시 뱅크스 비치라는 곳을 지나고 나니까 길은 해변에서 멀어지면서 또다른 분위기의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꼭 제주도의 올레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적한 해안가 산책로를 지나고 나니까 바로 UBC 대학 건물들이 즐비하게 이어진다. 드디어 로즈가든에 도착. 다행히 장미들이 아직 피어 있다. 로즈가든에서 바라보는 해안과 맞은편 산 풍경이 멋지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사진을 찍고 있다. 로즈가든은 역시 듣던대로 아주 작은 정원이다. 하지만 거기서 바라본 풍경이 아주 근사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나보다.




로즈가든을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니까 니토베 기념 정원이 나온다. 입장료는 약 7000원정도 한다. 정원 구경하는데 돈을 낸다는 것이 좀 아깝지만 그래도 워낙 유명한 곳이라니까 한번 들어가보기로 했다. 내가 여길 언제 또 오겠어? 정원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굉장히 예쁘게 꾸며져 있다. 커다란 연못을 중심으로 작은 섬도 있고 다리도 놓여져 있다. 한쪽에는 작은 폭포도 있고 징검다리도 놓여 있다. 일본풍의 탑도 있고 나무도 잘 가꾸어져 있다. 여기저기 사진 찍을 곳이 많았다. 그리고 시간만 맞으면 일본식 다도를 체험할 수도 있다. 즐겁게 정원 산책을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입장료가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에서 나와 대학을 가로질러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왔다. 정말 큰 대학이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밋업의 한영 언어교환 모임에 나갔다.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진행되는 토요 모임이다. 오늘도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점점 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젠 여기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편하다. 베트남 사람과 여러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와 함께 여기에 와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이들 형제가 비슷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나도 많이 헛갈렸다. 하지만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구별이 된다. 형은 수줍음이 많고 동생은 좀더 명랑하다. 오늘은 형과 여러번 마주쳤다. 이젠 좀 친숙해져서 우리는 농담도 했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미국 친구 M의 메이크업을 받을 준비를 했다. M에게 내 친구가 와서 메이크업 과정을 구경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좋다고 했다. 그래서 앞집의 대만 친구가 와서 구경을 했다. M의 어마무시한 장비를 보고 대만 친구가 놀랬다. 정말 많은 장비들이 동원되었다. 피부톤을 조절하는 기초 메이크업을 하고 이어서 눈 화장을 했다. M은 나에게 컬러풀한 화장을 원하는지, 내츄럴한 화장을 원하는지 물었다. 나는 내츄럴이 좋다고 했다. 눈 화장에 이어서 입술까지 해서 메이크업이 완성되었다. 갈색과 검은 색으로 눈 주위를 강조하고 입술은 갈색으로 자연스러운 톤을 살렸다. 이대로 드레스만 입고 나가면 파티에 가도 되겠다. 

메이크업이 진행되는 사이에 대만친구가 자기는 내츄럴보다는 밝은 화장이 좋다고 했다. 그랬더니 M이 블링블링한 화장품 세트를 보여주었다. 대만친구가 부러워하니까 M이 그 중 대만친구가 좋아하는 핑크로 블링블링한 눈화장 샘플을 만들어 주었다. 대만친구는 매주 토요일 이 시간에 여기 와도 되냐고 물었다. M과 함께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M은 친구랑 약속이 생기지만 않으면 대체로 집에 있는다고 했다. 나도 토요일에는 밋업 모임 외에는 별다른 약속이 없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저녁 6시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놀기로 했다. 오예! 자연스러운 영어 모임이 결성되었다.



메이크업 결과에 대한 사진을 찍고 화장을 지우고 M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M의 알레르기에 대해 좀더 많이 알게 되었다. 밀, 보리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단다. 나는 한국식 카레를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거기에 밀가루가 들어가 있어서 안된단다. 그녀는 자신만의 카레가루를 보여주었다. 밀가루가 없는 제품을 따로 구매해서 먹는단다. 많은 음식에 밀과 보리가 들어가 있어서 자신은 먹지 못하는 것이 많단다. 그럴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고추장에도 밀가루가 들어간다. 내가 M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요리가 거의 없다. 아쉽다. 아니,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 밀, 보리가 들어가지 않은 한국 음식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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