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화된 삶과 본질주의의 귀환(2)

by 디본

제2화. AI가 그린 그림에는 영혼이 있을까?

: 통계적 평균(Statistical Average)의 세계와 아우라의 소멸


1. 프롬프트 창 앞의 기묘한 공허함


"자전거를 탄 우주비행사, 19세기 인상파 화풍으로."


엔터키를 누르고 불과 10초 뒤, 모니터에는 반 고흐가 울고 갈 만큼 정교한 붓터치의 그림 네 장이 뜬다. 미드저니(Midjourney)나 달리(DALL-E) 같은 생성형 AI가 열어젖힌 세상은 경이롭다. 누구나 상상하는 즉시 시각화할 수 있는 '이미지의 민주화'가 도래한 듯하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 뒤에는 설명하기 힘든 뒷맛이 남는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감동했다"고 말하기는 주저한다. 완벽한 구도와 조명, 화려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 비평가들은 이를 "영혼이 없다(Soulless)"고 표현하고, 대중은 기괴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느낀다.


도대체 '영혼'이란 무엇이기에, 0과 1로 된 데이터 덩어리에는 깃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 현대의 미디어 이론가들을 소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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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벤야민의 '아우라': 원본이 사라진 자리


1936년,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가 도래하면서 예술 작품의 '아우라(Aura)'가 붕괴했다고 선언했다. 아우라란 원본이 갖는 '지금, 여기'의 현존성, 즉 그 물건이 겪어온 역사와 시간이 뿜어내는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를 뜻한다. 박물관에 걸린 실제 '모나리자'에는 아우라가 있지만, 기념품 가게 엽서 속 '모나리자'에는 아우라가 없다.


2025년의 AI 예술은 벤야민의 예언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한다. 디지털 사진은 그래도 피사체라는 '원본 현실'이 존재했다. 하지만 AI 이미지는 원본 자체가 없다. 그것은 수십억 장의 이미지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도출된 '확률적 근사치'일 뿐이다.


AI가 생성한 이미지는 서버 속의 전기 신호 외에는 물리적 실체도, 역사도, 작가의 고뇌도 담고 있지 않다. '원본 없는 복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한히 생성되는 이미지의 홍수에 빠져 있지만, 정작 그 어디에서도 '단 하나뿐인 존재'가 주는 전율(Aura)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AI 그림 앞에서 느끼는 공허함의 첫 번째 정체다.


3. 통계적 평균의 미학: 왜 모든 AI 그림은 비슷해 보이는가?


AI 그림을 계속 보다 보면 기묘한 기시감(Déjà vu)을 느끼게 된다. 스타일은 화려한데 어딘가 본 듯하고, 전형적이다. 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는 이를 '통계적 평균(Statistical Average)'의 문제로 지적한다.


생성형 AI는 학습 데이터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패턴, 즉 '평균값'을 학습한다. AI에게 "아름다운 여성"을 그리라고 하면, AI는 인터넷상의 수억 장의 인물 사진 중 대중적으로 "아름답다"고 태그 된 이미지들의 평균치를 출력한다. 그 결과물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지만, 개인의 고유한 개성이나 일탈은 제거된 '매끈한 평균'이 된다.


예술의 영혼은 종종 결함, 파격, 그리고 평균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온다. 찌그러진 붓터치, 의도적인 왜곡, 작가의 콤플렉스가 투영된 기형적인 형태...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평균을 거스르지만, AI는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확률 높은 '중간값'으로 수렴한다. 그래서 AI 예술은 "매끄럽지만 지루하다(Smooth but Bo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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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저항의 부재: 매끄러움에 대한 피로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현대 사회를 '매끄러움(The Smooth)'의 사회라고 비판했다. 스마트폰의 액정처럼 저항 없이 미끄러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잃어버렸다.


AI 예술 창작 과정에는 '저항(Resistance)'이 없다. 유화 물감의 끈적임, 돌을 깎아내는 육체적 고통, 필름을 현상하는 기다림... 인간 예술가는 재료의 물성과 싸우며(Struggle)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했듯, 장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 '저항'이야말로 작품에 인간의 혼을 불어넣는 통로다.


반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명령(Command)이다. "그려줘"라고 입력하면 1초 만에 결과가 나온다. 물리적 저항도, 시간의 지연도 없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물은 가볍다. 우리가 AI 그림을 보며 "와!" 하고 감탄한 뒤 1초 만에 스크롤을 내리는 이유는, 그 그림 속에 '축적된 시간의 무게'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소비되고, 쉽게 잊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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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뮬라크르의 5단계: 창작 행위의 연극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단계를 시뮬라크르라 불렀다. 시뮬라크르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들을 말한다. 현대 연구자들은 AI 예술이 시뮬라크르의 새로운 단계, 즉 '창작 행위 자체의 시뮬레이션'에 진입했다고 분석한다.


AI 이미지 생성 과정을 보여주는 로딩 바(Loading Bar)는 마치 누군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뇌하는 주체가 없다. 오직 노이즈를 제거(De-noising)하는 수학적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창작'이라는 인간 고유의 성역마저 알고리즘에 의해 연극(Performance)처럼 수행되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이 그림엔 영혼이 없다"는 말은, 창작의 주체인 인간이 소거된 채 결과물만 덩그러니 남은 상황에 대한 실존적 공포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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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맺음말: 결함(Imperfection)을 사랑하는 법


결국 2025년의 우리가 다시 LP판의 잡음을 찾고, 초점이 나간 필름 사진에 열광하는 이유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완벽하지만 차가운 AI의 세계에 대한 반작용이다. 우리는 무결점의 데이터보다, 결함 있는 물질에서 인간적인 온기를 느낀다.


AI가 그린 그림에는 영혼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역설적으로 명확하다. '영혼'은 매끄러운 완벽함이 아니라, 거친 저항과 불완전함 속에 깃든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진짜'를 찾기 위해, 모니터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다음 화에서는 그 '진짜'를 찾아 한강 다리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기이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 본다.


[다음 화 예고]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서울, 그 한복판에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으로 멍을 때리고 있다. 심박수가 가장 안정적인 사람이 우승한다는 이 기이한 대회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제3화. 현상 분석 1 (도파민 디톡스): 한강에서 멍 때리는 80명의 현자들 편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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