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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소한 기억 Jul 12. 2018

하버드대학교에서 인턴하기

인턴 후기(1)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두 번의 인턴 기회가 있었다. 둘 다 인턴쉽을 이수하면 학점을 받는 학과 수업의 연장이었다. 가장 중요한 페이는 무급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대학원으로 돌아갔다. 자연히 한국의 인턴과 비교가 되었다. 미국에서 겪은 인턴 생활도 인턴쉽마다 여러모로 달랐다.


하버드 식물학 도서관과의 만남

내 첫 번째 인턴 생활은 한 학기 동안 아카이브(기록보관소)에서 70시간의 인턴쉽을 이수하는 것이었다.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2주 정도의 근무시간이므로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기 중에 수업과 병행해서 14주 내에 이수해야 했다. 담당 아키비스트인 리사와 의논하여 일주일에 하루씩 수업이 없는 날 일하기로 했다. 이 인턴쉽은 아키비스트(기록전문가)를 위한 초급 과목의 일부로, 필수적으로 인턴쉽을 이수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학생이 이 과목을 신청할 때 자기소개서를 함께 제출한다. 그러면 학교와 연계된 보스턴 내의 대학도서관, 기록보관소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학생을 요청한다. 그 후 학교에서 해당 기관과 함께 정해서 학생에게 어느 기관에게 인턴쉽을 할 것인지 통보한다. 내가 석사를 할 학교를 정할 때 보스턴으로 정한 대에는 이 인턴쉽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어쩌면 하바드나 MIT에서 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주의 학교보다 보스턴이라는 학교의 위치에 매력을 느꼈다.


인턴의 업무

미국에 오기 전부터 일해 보고 싶다고 내심 생각했던 곳이 있다. 하버드와 M.I.T였다.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내가 일하게 된 곳이 하버드 대학교의 식물학 도서관 겸 기록보관소였다. 처음부터 해당 기관에서 필요한 업무를 정해놓고, 그 업무를 할 사람을 요청한 경우였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1800년대 ~1900년대의 중국 식물 카탈로그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이었다. 한국에서 미술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던 경력과 아시아인이라는 점에서 내가 해당 업무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컬러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컬러 사진도 없던 시절을 상상해보자. 중국에서 수입한 꽃나무나 과일나무를 팔아야 한다. (나는 1800년데에도 묘목이나 모종을 팔았겠구나 하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무슨 꽃이 피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 알아야 그 식물을 살 것이 아닌가. 더구나 타국에서 자라는 꽃이며 열매라서 어떤 모양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당시의 식물 판매 업체는 식물 카탈로그를 그려냈다. 어떤 꽃이 피는지, 나뭇잎은 어떤 모양인지. 꽃이 떨어진 후 씨방이 생기고 열매가 맺는 과정을 하나하나 해부도처럼 그려냈다. 물론 실제의 꽃과 열매, 잎의 색도 재현했다. 이 카탈로그 하나면 이 나무가 어떤 일생을 살게 될지 도면처럼 펼쳐진다. B3에서 A3 정도 사이즈의 이 종이들은 무겁고 튼튼해서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은 최근에 그린 것처럼 깨끗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담당하게 될 문서의 상당 부분은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곰팡이가 피고, 물방울 얼룩 같은 것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림을 처음 보면 좀 생소한 느낌이 든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 그림들은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니다. 서양화의 재료로 동양화의 기법을 접목시켜 그려낸 느낌이랄까. 세밀한 묘사와 색은 서양화에 가깝고, 공간감이 느껴지지 않는 2차원적인 묘사는 동양화의 느낌을 준다. 카탈로그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예술 작품인 줄 알았다.

판매용이기 때문에 대부분 아름다운 꽃이었다. 카탈로그 전부 중국의 꽃이었는 데 본 적이 있는 익숙한 꽃이 많았다.


내가 작업했던 꽃의 목록은 현재 하버드 대학교 식물학과 도서관 온라인 페이지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아름다운 작품이 굉장히 많았는 데, 온라인으로는 일부 이미지만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http://botlib.huh.harvard.edu/libraries/chinese_bound2.htm


업무를 진행하는 방식

나에게 이 업무를 맞긴 아키비스트 리사는 해당 문서의 상태(얼룩이 있는지, 있다면 큰 지 작은지, 곰팡이가 피지는 않았는지, 연도가 적혀있는지, 종이는 찢어지거나 구석이 잘려나가지는 않았는지 등등), 필기체로 적은 식물의 이름, 워터마크 유무 여부 등을 엑셀로 남기고 스캔을 뜨는 작업을 맡겼다.

당대의 판매자는 아름다운 필기체로 이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림마다 적어 놓았다. 이 업무에서 나를 가장 난감하게 한 것은 이 필기체였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숙제를 오직 필기체로만 작성하게 해서 필기체 사용에 익숙해지게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20년이 넘게 영어를 공부한 나의 경우 필기체를 본 것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몇 번 따라 써 본 것이 전부였다. 나는 리사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필기체를 알아보는 게 쉽지 않을 거 같아.
내가 이 업무를 진행해도 괜찮을까?"

한국에서 일할 때 나도 대학생 인턴 친구들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있다. 내가 인턴에게 부탁했던 업무는 특정 목록의 웹사이트 주소나 전화번호를 찾는 것처럼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 간단한 작업조차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겪어보면 알게 된다. 잠시 일을 맡겨본 적이 있는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았을 때, 나 자신이 썩 미덥지가 않았다.


리사는 미소 지으며


"사실 이 필기체를 읽는 건 우리도 쉽지는 않아. 하지만 이렇게 해보자."


그녀는 먼저 식물학 데이터베이스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어차피 여기에 적혀있는 식물명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과는 달라. 제대로 글자를 읽었다면,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조회하면 정보가 나올 거야. 거기에 있는 사진과 대조해보면 돼. 그래도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이렇게 선뜻 날 믿고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내심 내가 맡은 업무가 좋은데, 내게는 이 업무가 적절하지 않으니 다른 업무를 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차였다.


한 번은 아무리 봐도 뭐라고 읽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필기체가 등장했다. 가능성이 있는 문자열을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조회가 되지 않았다. 리사에게 나 이건 정말 못 읽겠어하고 물어봤다. 몇 번 그렇게 물어봤을 때 답변해주었던 리사도 이번에는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내가 봐도 잘 모르겠네."


그러더니 오후에 노교수님이 도서관으로 방문하셨다. 문서를 보시고는


"잎의 모양을 보니 이건 ~~~ 네."


하고 읽어주고 가셨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교수님이 일부러 도서관을 들르신 모양이다. 교수님의 소탈한 모습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교수-사서(교직원)-인턴 커뮤니케이션하고 일하는 방식이 신선했다.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자격으로 일을 하는구나.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것인데, 한국에서의 권위적인 의사소통과는 다른 느낌에 놀라웠다.


리사는 첫날 어떤 업무를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고, 문서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남기는지 알려주었다. 그 후로는 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곳이 도서관의 사무 공간 바로 앞이라서 그곳을 지나갈 때 가끔 일은 잘 되고 있어? 어려운 건 없어? 하고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업무를 마무리하고 저장한 뒤에 퇴근하면 오늘 어땠어 물어보고 끝이었다.


리사는 예일 대학교가 있는 도시 프로비던스에 산다고 했다. 그런데 기차 시간 때문인지 그녀는 늘 7시-4시 근무를 한다고 했다. 굉장히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이렇게 유연한 스케줄로 일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이어지는 리사의 말은 이랬다.

"너는 도서관이 문을 닫는 5시까지 일해도 괜찮아. 업무가 끝나면 usb에 작업 내용을 저장해서 내 책상 위에 두고 가면 돼."


열정 페이에 대응하는 미국 대학의 방법

그다음 인턴 때도 그랬지만 인턴 생활동안 업무시간을 매우 철저하게 지켰다. 5시에 퇴근한다는 의미는 그 전에 pc를 종료하고 하루 업무 내용 정리를 마친다음 5시 정각에 가방을 들고 나간다는 뜻이었다. 5분이라도 더 일하면 왜 아직 퇴근을 안 하냐며 궁금해했다.

내가 한국에서 일할 당시 미술계의 열정 페이가 신문 지면을 오르내렸다. 많은 관련 학생들이 선망하는 도슨트나 미술관 전시지원 인턴의 경우 교통비, 밥값 정도만 주고 일 시키는 관행이 있었다. 그래도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아 경쟁률이 높았다. 그 친구들은 인턴쉽을 통해 경험을 쌓고 싶은 것이지 자신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고 하면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그런 젊은 친구들의 열정을 대가 없이 가로채고 있었다. 그렇게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인턴들에게도 야근은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업무시간 지났는 데 왜 집에 안 가냐는 질문이 그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70시간의 인턴쉽을 마쳤을 때, 내가 작업하던 문서가 몇 장 남아있었다. 반나절 정도만 더 일하면 마무리지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마침 학기도 끝나서 방학이었다.


"문서가 얼마 안 남았는 데 아쉬워. 내가 하루 더 가서 마무리하면 될 거 같은데 그렇게 해도 될까?"


이에 대한 답변은 왜 퇴근 안 하냐는 질문보다 훨씬 당황스러웠다. 리사에게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마무리를 짓겠다는 동양인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단호박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미안. 그건 안 될 거 같아. 하버드에서는 인턴쉽에 대한 분명한 정책이 있어. 무급 인턴은 정해진 시간을 초과해서 일해서는 안돼. 네 작업은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게. 그간 수고했어."


무료로 착취당할지도 모르는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임이 분명했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아쉬운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야근을 해서라도 마무리지을 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조차 나는 너무나 한국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인턴의 밥 먹기

첫날 내가 일하게 될 도서관과 함께 소개받은 공간이 있었다. 바로 탕비실이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개수대가 있었다. 5명 정도 되는 인원이 앉을 수 있는 식탁도 놓여있었다. 식탁 바로 앞은 통유리창이어서 건물 밖이 시원하게 보였다. 도서관 직원들은 물론 교수님과 학생들, 그리고 같은 건물에 있는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다 같이 사용했다.

일을 시작하는 첫날에는 함께 일할 사람과 같이 밥을 먹겠지? 매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첫날은 그러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도 다음 인턴쉽을 한 곳에서도 같이 일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나도 그랬지만 다른 직원들을 봐도 같이 밥 먹으러 가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페이스북으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친한 직원들도 식사는 따로 했다. 내가 일한 곳이 도서관이고, 각자 근무 스케줄을 가지고 일하는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했던 하버드 대학교 식물학 도서관이나 그다음에 일한 브루클린 공공 도서관이나 가까운 곳에 밥을 먹을 만한 장소가 별로 없기도 했다. 직원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다.


하버드 대학교는 넓은 곳이다. 우리 건물에 매점이나 식당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하버드 대학교 밖으로 나가면 먹을 곳이 몇 곳 있지만 점심시간에 나가서 먹고 오기에는 시간이 좀 빠듯했다. 점심은 어떻게 해야 하지? 내 고민에 응답한 걸까. 점심시간마다 푸드 트럭이 탕비실 통유리 너머로 나타났다.

즉석에서 주문을 받아서 음식을 해주는 종류의 트럭은 아니었다. 피자, 파스타(미리 준비한 면에 소스를 부어서 준다), 아란치니(이탈리아식 주먹밥 튀김)와 같은 간단식부터 감자칩, 초콜릿, 젤리 등을 파는 간이매점 트럭이었다. 아담한 트럭에는 마치 좌판처럼 다양한 먹거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따뜻하고 저렴한(가난한 무급 인턴 유학생에게는 매우 중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좋았다. 심지어 우리 학교 구내식당보다 맛있고 가격도 저렴했다. 매주 새로운 메뉴를 시험해가며 탕비실에서 밥을 먹었다.

공용 식탁에서 밥을 먹다 보면 일전의 노교수님과 다른 대학원생들을 종종 만났다. 다들 말없이 각자의 밥을 먹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가 매일 이것저것 사 먹는 것을 본 노교수님이 나에게 뒤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를 가리키셨다.


"너도 여기에 네 도시락을 싸와서 넣어두면 돼."


아마 내가 맨날 사 먹는 것이 도시락을 가져와도 보관할 곳이 없어서 못 들고 오나보다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곳에서 밥 먹는 사람들은 나 빼고 모두 도시락을 먹었다. 미국인들의 도시락 메뉴는 뭘까 궁금해서 슬쩍 보면 빵이나 샌드위치도 있고, 샐러드나 라자냐 같은 걸 싸오기도 했다. 대부분은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아서 퓨전 메뉴를 갖춘 한솥 같은 도시락집이 있다면 장사가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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