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 버드나무 Oct 06. 2021

01. 왜 하필 아이슬란드였을까?

또 한번 내 우주의 빅뱅을 열망하며, 15년 만에 워크캠프를 재도전하다

주변의 누군가가 추천해 준 것도 아니었고, 등반이나 캠핑 같은 아웃도어 스포츠에 취미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특별히 빙하에 대한 낭만이나 호기심이 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별다른 고민 없이, 어디 비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꿈이나 되는 것 마냥.     


뜻밖의 안식년을 얻게 된 그 해, 무급 휴직이라 한창 가내 긴축재정을 실시할 때였지만 문득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입사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동안, 일주일 넘게 휴가를 써 본 적은 딱 한 번, 신혼여행뿐이었다. 학창 시절엔 제법 고생스러운 여행을 즐겼고 현지인들 가까이서 천천히 머무는 경험을 선호했는데, 직장인이 된 후에는 왠지 휴가도 프로젝트처럼 야무지고 완벽해야 할 것처럼 강박을 느꼈다.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은 매번 ‘최단시간 최다코스’ 혹은 ‘최장시간 최소코스’의 여행 방식으로 귀결했다. 피 같이 아까운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구경하고 싶어서 근면성실한 노동자처럼 관광하거나, 너무 지친 상태라 숙소에 틀어박혀 종일 내부 서비스만 이용하다 오거나.      


바특한 일정 때문에 가보고픈 식당과 카페를 다 들를 수 없어 억지로 4끼를 먹고 2-3곳씩 커피 투어를 다니던 날도 있었고, 숙소에서 방콕 한터라 피곤할 것도 없으면서 매일 마사지를 받겠다며 엎드려 있던 날도 있었다. 때론 ‘먹방 투어’라며 깔깔댔고, 때론 ‘호캉스’라 우쭐했지만 종종 스스로가 미련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리고 연민이 갔다. 일이 고되고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시발비용이 늘던 것처럼,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다는 ‘조바심’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절박함’이 커질수록 여행경비도 불어났다. 마치 소비만이 내 가치를 증명해 준다는 듯이. “젊어서는 시간이 있어도 돈이 없고, 나이가 들면 돈이 있어도 시간이 없다”던 인생 선배들의 말이 뼈저리게 아팠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갑작스럽게 나는 시간 부자가 되었고, 통장에는 아직 약간의 돈이 남아 있었다. 남편도 응원해 주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재충전이 필요하단다. 그래, 난 충분히 떠날 자격이 있다!      

그럼 어디로 갈까. 방바닥에 엎드려 세계지도를 펴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학시절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 빠져 쿠바 뒷골목에서 살사를 배우겠다던 버킷리스트가 아직 남아 있고, 히말라야의 마지막 샹그릴라이자 GDP(국민총생산) 대신 GDH(국민총행복)를 선언한 국왕이 살고 있는 부탄도 오랫동안 1군 후보이고, '유럽 속의 이슬람'이라는 스페인 안달루시아도 늘 궁금했는데...      


그러다가 불현듯 첫 해외여행이 떠올랐다. 15년 전 부산항에서 ‘비틀’이라는 쾌속선을 타고 다다랐던 일본 후쿠오카. 버스를 두 번이나 더 갈아타고 들어가야 했던 시골 마을에서의 3개월, 내게 지구촌의 첫인상이 되어준 국제워크캠프의 추억이 말이다. 여행으로는 느끼지 못했을 일상의 속도와 맛, 관광객으로는 체험하지 못했을 문화의 속살, 스쳐가는 이방인으로는 맺지 못했을 진한 관계들, 그리고 타자의 눈으로 바라본 새롭고 낯선 나. 훗날의 진로도, 삶의 취향도,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도, 타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모두 거기서 시작되었다. 내 20대의 빅뱅이 그때 있었다.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래, 다시 워크캠프를 도전해보자! 한껏 쪼그라들고 구겨진 나, 이젠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나를 다시 밧밧하게 펴서 제대로 한 번 봐보자! 곧장 컴퓨터를 켜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참가신청 페이지의 검색 항목을 보니, 대륙, 국가, 주제별로 조건 검색이 가능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국가’ 란을 클릭하자 70여 개가 넘는 나라 목록이 두루마리처럼 쭉 펼쳐졌다. 아쉽게도 쿠바와 부탄은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익숙하고 생소한 이름들 사이로 스크롤이 부유하다가 갑자기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아이슬란드! 왠지 꽤 멀고, 아주 낯설고, 도통 모르겠고, 이번이 아니면 가기 어려울 것 같은 곳. 그곳에 내 마음이 닻을 내려버렸다.      


이미 상상 속의 나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국적 모를 음식을 단란하게 나눠먹고 있었다. 인생의 타임라인이 십오 년 전으로 되감기는 기분이었다. 왠지 20대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30대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번 내 우주의 대 팽창 '빅뱅'을 맞게 될는지도 모른다. 마른나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오랜만에 지펴진 열망의 불씨는 미친 듯 타올랐다.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이젠 멈출 수 없었다.      


무조건 가고야 말겠다. 아니 꼭 가야만 한다! 

그땐 미처 몰랐다. 택해야 할 갈림길과 넘어서야 할 고민들이 곧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 국제워크캠프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청년들이 모여 1~3주간 함께 생활하며 봉사활동과 문화교류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1920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마을 재건을 위한 평화운동으로 시작해 지금은 전 세계가 참여하는 국제자원봉사활동으로 발전했다. 각 국의 비영리 단체들이 일손이 필요한 활동들을 기획·공고하면, 참가를 희망하는 청년들이 관심 있는 국가, 주제를 검색하여 신청하게 된다. 이름을 들어봄직한 웬만한 나라들은 대부분 참여하고 있으며, 활동 주제도 환경, 복지, 보수, 교육, 농업, 언어, 문화, 예술, 축제, 세계유산, 스포츠, 평화, 아동, 청소년, 동물 등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다. 참가 희망자는 신청 시 소정의 참가동기서(자기소개서)를 제출해야 하며, 호스트 단체들은 가급적 언어, 문화, 성별 등의 다양성을 반영해 참가자를 선정하고 있다.      

* 국제워크캠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http://www.workcamp.or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