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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시 Jan 04. 2019

토종

음식 동화 9 :: 청경채

조용하게만 보이는 냉장고 나라. 그 안에서 작지만 큰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어요. 일렁임의 시작은 푸릇푸릇함을 잃어가고 있는 배추. 이에 동조한 건 피부가 물러져 가는 양파와 구멍이 나기 시작한 무우였고요. 입을 다물고 있던 파프리카와 피망도 탱탱한 살결이 흐물해지자 입을 열었어요. 끝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건 쌀. 그곳의 터줏대감인 쌀 노인은 서서히 커지는 감정들을 그림자처럼 지켜 보고만 있을 뿐이었지요. 청경채를 향한 따가운 눈살들 말이에요.


외국서 나고 자란 청경채. 그가 이 나라에 입국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냉장고를 관리하는 사람이 '식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를 먹기 시작했거든요. 기실 청경채의 활약은 대단했어요. 어지간한 고기 요리에는 다 잘 어울렸고, 그 자체를 물에 삶거나 양념을 해서 무쳐먹어도 쉬이 시들지 않는 아삭함을 뽐냈지요. 이토록 종횡무진하며 일을 하는 '외국 태생' 청경채에 대한 이기죽거림이 시작된 거예요.


이제 배추는 대놓고 이렇게 말했어요.


"요즘 왜 이렇게 물을 버리는 것들이 많담."


그에 맞장구 치는 건 배추의 친구 고추.


"그러게 말이야. 여기엔 이 나라 고유의 토종 음식만 살아왔는데 말이지."


몸통 한가운데로 바람이 새어들어가고 있는 무우도 거들었지요.


"암암. 신토불이 몰라? 신토불이!"


뾰족한 말의 화살을 맞고 있는 청경채는 모든 걸 무심하게 넘겼어요. 일을 하는 것도 그로 인해 인정을 받고 있는 것도 즐거웠던 것도 이유이지만, 타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함부로 입을 열기 힘들었거든요. 게다가 청경채의 입장에 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요. 그러자 화살은 점차 청경채에 대한 인신 공격 쪽으로 향했어요. 시작 역시 커다란 잎사귀가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 배추였지요.


"키도 저렇게 쪼만해서 간에 기별이라도 가게 하겠나?"


알록달록한 파프리카도 목소리를 더했어요.


"푸르딩딩한 색깔은 또 어떻고?"


결정타를 날린 건 울그락불그락한 대추.


"저것의 부모도 그렇게 생겨 먹었겠지?"


드디어 청경채는 발끈하고 말았어요.


"뭐라고? 지금 한 말 다시 해봐!"


대추가 말을 이었어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 말이죠.


"누가 틀린 말을 했나? 모두 잘 지내던 이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은 게 누군데? 냄새 나니까 더 지껄이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그러자 청경채가 화를 애써 누르며 말했어요.


"그럼 네 아래에 있는 키위나 멜론은? 사실 파프리카도 외국산 아닌가? 그들을 볼 때에는 쓰지 않던 안경을 왜 자꾸 나에게만 들이대는 거지?"  


아직 능숙치 못한 말투였지만 그의 초록빛깔 말에는 힘이 들어 있었어요. 그때였어요.


"파프리카만이 아니다."


말을 아끼고 있던 쌀 노인이었어요. 그는 이 땅에 1만 5천 년 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노인이 입을 열자 모두들 숙연해졌어요.


"대추, 너의 할아버지는 내가 잘 알고 있지. 먼 길 오시느라 지쳐계셨기에 우리집에서 며칠 간 모신 적이 있다. 그때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지."


대추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어요.


"이...인도요?"


"그래. 저기 저쪽에 있는 후추가 살던 나라 말이다. 그리고 네 이놈 무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재배 면적을 자랑하는 녀석이 마음 씀씀이는 왜 그렇게 좁은 게냐? 너 역시 전세계에서 나고 길러졌다는 걸 모르느냐?"


신토불이를 운운했던 무우의 하얀 두 볼이 발그레 해 졌어요.


"그리고 고추! 너는 김치에게 네 유래를 몇 번이나 듣지 않았느냐? 네가 오기 전에는 백김치뿐이었는데 큰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걸. 그런 녀석이 청경채를 외국에서 왔다고 놀려?"


고추의 빨간 두 볼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어요. 지중해 연안에서 온 양파, 남은 건 배추뿐이었어요. 그는 친구들에 대한 쌀 노인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등등했지요. 자신만큼은 유일한 토종이라면서요.


"얘, 배추야. 그럼 어서 너의 사촌을 끌어안아주거라."


"네? 제 사촌... 누구를요?"


배추가 화들짝 놀랐어요.


"네 혈육 청경채이지 누구긴 누구? 같은 중국 태생이면서 언제까지 그렇게 모른 척 할 테냐? 대파 너도! 외국에서 전래된 호박, 고구마, 감자, 옥수수! 너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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