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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정 Oct 01. 2023

밤산책

밤공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주말 내내 집에만 있었다. 약속도 없고 나갈 일도 없는 휴일이 무료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어도 더위가 해결되지 않는 한여름이 찾아왔다.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한번 폈다. 산책이나 가볼까. 듣는 사람은 없는데 적적한 마음에 괜히 중얼거리며 옷을 챙겨입었다.


긴 해도 다 져버린 늦은 저녁이건만, 밤공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익숙한 거리를 헤집는다.


집 앞 꽃집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이자카야를 지난다. 일요일 저녁인데도 사람이 북적인다. 안 가본 지 꽤 오래됐지만 집 앞이라 한때는 주말마다 갈 정도로 단골이었다. 김초밥이 맛있었던가. 자주 먹던 메뉴를 떠올리며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그 후로는 언덕길이다. 오르막을 조금 가다 보면 이내 한적한 주택가가 나온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길고양이가 소리 없이 지나간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고양이에게 줄 간식은 없다. 고요한 주택가를 지나면 하천이 나온다. 하천가로 내려가 산책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밤 산책을 하는 연인들이 많다. 이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손을 꼭 잡고 걷는다. 재잘재잘 웃음소리가 들린다. 뭐가 그렇게들 웃기는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굴다리가 나온다. 무심코 기둥을 보게 되었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잊으려 애써도 잊히지 않는 이름이 새겨진 기둥. 내 이름과 네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다. ‘사랑해’라는 세글자와 함께. 함께 걷는 밤 산책을 좋아했다. 여름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너와 그런 너를 사랑하는 내가 되살아난다.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흐리면 흐려서 찾아갔던 집 앞 이자카야. 길고양이에게 준다며 챙겨 다니던 간식, 그리고 소소한 말을 재잘거리며 서로를 보며 웃던 우리의 시절이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밤공기를 쐬러 나갔다가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너를 흠뻑 묻혀 돌아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샤워한다. 아무리 씻어도 너는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여름을 사랑한다고 말했고, 나는 여름이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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