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를 발생시키는 글쓰기에 관한 세 편의 글
글쓰기가 쉬웠던 적이 한 번도 없긴 했지만, 요즘만큼 어렵게 느껴진 적도 없다.
그럴 때마다 처방전처럼 들춰보는 글들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나는 저것보다는 낫지.' 하는 값싼 위안을 얻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가 있는데 바로 이 경우다. 누가 봐도 글을 너무나 잘 쓰고 나의 전범으로 삼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스스로의 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학하고 글을 쓰는 게 어렵다고 토로하는 글을 발견할 때다. 내가 가진 작가들의 이미지는 치열한 고민 끝에 글을 써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학까지 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때문에 내가 처방전으로 삼은 글들을 보면서 작은 위로를 받는다. 내 글과 그들의 글을 떠올리면서, '나는 아직 덜 고통스럽구나.' 생각하면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마음이 (잠깐이지만) 든다.
첫 번째 글은 내가 가진 작가의 이미지를 바꿔 준 글이다.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지점은 '이 글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를 스스로는 절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아주 못난 글도 자신에겐 명작처럼 보일 수 있고, 아주 뛰어난 글도 자신에겐 졸작처럼 보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문단을 비롯해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작가들은 이미 그런 단계를 뛰어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도 여전히 스스로의 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는 점이 새로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가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쓰기가 과연 어떤 지점에 도달했는가 혹은 그 지점을 돌파했는가 하는 문제에 온통 매달려 있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면서도(내가 정말 '그것'을 쓴 게 맞나요? 내가 쓴 '그것'을 당신들이 정말 알아보고 있나요?) 그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그러나 내가 저들의 박수갈채에 굴복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냉소와 무관심에도 굴복해서는 안 된다), 혹은 자신의 도달과 돌파 그 자체가 타인의 인정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 자들, 그보다는 현재의 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의 타인들을 기다리는 자들. 차라리 미래의 타인들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미래의 타인들을 길러내기 위한 글을 쓰는 자들.
- 권희철, 「나, 문학권력은 이렇게 말했다」,『정화된 밤』
작가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권희철은 그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정말 '그것'을 쓴 게 맞나요? 내가 쓴 '그것'을 당신들이 정말 알아보고 있나요?'
타인의 인정이 필요없는 글쓰기는 일기일 뿐이다. 일기가 무용하다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들은 정말 많다. 일기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이들은 타인/독자가 자신의 글을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 글을 읽어준 타인의 반응에 종속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게 만드는 이유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최초의 자신이 쓰고자 했던 바들을 써내지 못한다면, 그건 본말이 전도된 상태다. 그 지점을 권희철은 '그러나 내가 저들의 박수갈채에 굴복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냉소와 무관심에도 굴복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두 번째는 글쓰기가 어려울 때마다 들춰본 글이다. 섣부르게 단언하자면, 나는 신형철만큼 '아름다운' 글을 이토록 '잘' 쓰는 사람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
다음 두 개의 명제를 늘 붙들고 있다. "예술에 열광하는 것은 비평가와는 무관하다. 그의 손 안에서 예술작품은 정신들의 투쟁 속에서 번뜩이는 칼이다."(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 "사람들은 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판단이라든가 이성이라든가 냉안(冷眼)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애정이라든가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고바야시 히데오,「비평에 대해서」) 이 두 명제를 모두 존중한다. 가능하다면 그 둘 모두를 내 글이 감당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후자의 위치에 설 때 더 행복했다. 나에게는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야망이 많지 않다. 나는 차라리 압도적인 특수성 혹은 매혹적인 주관성이고 싶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오로지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 신형철, 「책머리에」,『몰락의 에티카』
학부 시절, 이 글을 처음 접한 순간부터 '전범'으로 삼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한 편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창작보다는 비평에 관심이 많았고, 현실의 높은 벽을 인지하고 포기했지만 그 뒤로도 종종 글을 쓸 기회가 생기면 이 글을 떠올렸다.
나에게는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야망이 많지 않다. 나는 차라리 압도적인 특수성 혹은 매혹적인 주관성이고 싶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이 문장을 외울 정도로 자주 읽었고, 그의 압도적인 특수성과 매혹적인 주관성에 오래 매료되어 있었다. 나에겐 완벽한 글을 쓰는 사람인데, 근래 읽은 인터뷰에서 신형철의 고백을 보자 솔직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작가도 글쓰기를 어려워하는데, 내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Q. 끊임없이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매우 지난한 작업이잖아요. 영원히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게, 스스로 지친 적은 없나요?
A. 그게 직업이니까요. 생각하고 또 표현하는 게 직업이니까, 계속해야죠. 그런데 스스로 만족이 안 되는 순간을 ‘지친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상태는 주기적으로 와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걸 응용해 본다면 ‘라이터스 로우(writer's low)’라고 할까, 글쟁이의 우울함이 있는 것 같아요.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아, 굳이 나까지 쓸 필요 있을까, 그런 생각이 진지하게 밀려오면서 의욕이 떨어지는 상태요.
- 채널예스 인터뷰, 신형철 “섬세해지고자 노력하는 공부”
마지막 글은 가장 최근에 읽은 정용준 소설가의『밑줄과 생각』에 나온 글이다. 이 글에서 정용준 작가는 자신이 겪는 글쓰기의 괴로움에 대해 토로하며, 선배 문인인 김수영 시인의 산문에서 위안을 얻는다.
김수영은 자학한다. 수치를 느끼고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 때론 지나치게 위악적이고 어떤 날은 지나치게 저자세로 자신의 글을 반성한다. 혼자 너무 진지하고 너무 심각하다. 나는 좋다. 어떤 이들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그래서 쓰레기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글이 좋다. (…) 그가 빛나게 쓰는 게 아니라 ‘빛나게 쓰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쓰겠다’라는 마음으로 쓰는 그의 글이 내 눈에 빛나 보이는 것이다.
(…)
보기에 따라 감정에 휘둘려 뜨거운 문장을 마구 휘갈겨 쓰는 것처럼 보인다. 휘갈겨 쓴다고? 아니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그의 진지함과 문학적 태도를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는 글에 대해 엄격하고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목표를 정해놓고 있다. 이상적인 기준을 정하고 작가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매일이 괴롭고 아무리 애써도 성에 차지 않는 불행한 작가가 된다. 게으르다 느끼고 무책임하다 느끼며 함부로 막 쓴다는 자책으로 몸과 마음을 학대한다.
(…)
자신이 쓴 글이 글도 아닌 그저 글씨의 나열이라는 고통스러운 인식, 애써 쓴 시에서 전혀 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슬픈 고백. 아무 의미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글씨의 나열을, 돈을 받고 쓰고 시로 발표하고 있다고 자책하는 작가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걸까?
- 정용준, 「자책하며, 쓴다」,『밑줄과 생각』
정용준 작가도 뛰어난 소설가이며, 김수영 시인도 위대한 시인이다. 김수영 시인의 언어적, 시적 성취만큼에 도달한 시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가들도 이토록 괴로워 한다. 자신의 글이 그저 글씨의 나열일 뿐이고 글도 아니라는 자책은, 얼마나 솔직한가. 두 사람의 고통을 경유하면서 도달한 마지막 문장에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쓰는 것이다. 잘 쓰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마음을 글쓰기를 위한 재료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 나쁜 에너지도 좋은 에너지도, 욕하고 논쟁할 수 있는 담론으로서의 가치조차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안전하고 편안한 작가들아. 쓰지 않고서 쓰는 자로 살 수는 없다. 김수영을 읽고 내가 한 다짐이다.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 쓰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말을. 그 말에 염치없이 의지해 써야겠다. 그게 아무 의미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글씨의 나열일지라도. 그저 공허한 감정과 실패한 언어들의 폐허일지라도. 권희철, 신형철, 정용준을 읽고 내가 한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