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성하는 존재인가, 접속하며 생성하는 존재인가

데카르트에서 들뢰즈, 그리고 새로운 자기계발에 대해

by wis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답답했던 적이 있나요? MBTI 결과표에 나를 끼워 맞추려 애쓰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주문에 지쳐본 적은 없습니까? 어쩌면 '진짜 나'는 내 안의 어딘가에 완성된 채 숨어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흔들리지 않는 '나'가 내 안에 있다고 믿곤 합니다. 자기계발서는 의지를 다그치고, MBTI는 우리를 특정 유형 안에 가두려 하죠. 하지만 정말 '나'는 고독한 반성 속에서만 발견될까요?


이 글은 이러한 '반성적 주체' 관념에 도전하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시선으로 '나'를 새롭게 바라봅니다. 들뢰즈에게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끊임없는 '접속(connection)'과 관계 맺음 속에서 유동적으로 '되어가는(becoming)'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중체(doublet)' 개념과 '사랑해'라는 선언의 예를 통해 주체가 어떻게 고정된 동일성에서 벗어나는지 살펴보고, '배치(assemblage)' 라는 개념을 통해 환경과 관계가 우리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탐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내면의 의지만 강조하는 전통적 자기계발과 MBTI 같은 자기 규정 방식의 한계를 비판하고, 제임스 클리어의 환경 설계나 장인을 찾아갔던 제자들의 사례처럼 '배치'를 바꾸고 '생생한 접속'을 시도하는 것이 어떻게 실질적인 변화를 이끄는지 제시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반성'과 '접속'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내면의 성찰(반성적 직조)과 외부 세계와의 깊고 생생한 만남(네트워크적 직조)을 함께 엮어가는 '이중직조(dual weaving)' 야말로 진정한 자기 성장과 '나-되기'의 길임을 제안합니다. 고정된 '나'를 찾는 여정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생성하는 삶의 가능성을 함께 탐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서론: '나'는 어디에서 오는가? 반성 속의 자아 vs. 관계 속의 생성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던진 이 명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 철저한 회의 끝에 마침내 도달한 유일하고 확실한 진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 앞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하고 있음' 자체를 되돌아보는 '반성(reflection)' 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단단한 중심을 세우려 했습니다. 이 '반성적 주체' 는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존재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수 세기 동안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강한 의지를 가져라' 같은 자기계발 메시지, 혹은 MBTI 같은 유형론을 통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규정하려는 현대적 경향 속에도 이러한 '반성을 통해 확립된 고정된 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하지만 정말 '나'는 그렇게 고독한 반성 속에서 완성된 채 존재하는 것일까요? 나의 생각은 정말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홀로 명증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나'는 내가 맺는 관계, 내가 속한 환경, 내가 사용하는 도구와의 끊임없는 만남 속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반성'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성적 흐름은 아닐까요? 이 글에서는 데카르트의 '반성적 주체'에서 출발하여, 들뢰즈의 철학을 빌려 '관계와 배치 속에서 생성되는 나'라는 새로운 관점을 탐색하고, 이를 통해 자기계발의 방향성을 재고해보고자 합니다.




들뢰즈의 관점: 반성을 넘어, 차이와 생성의 운동으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데카르트가 '반성'을 통해 도달했다고 믿었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의 명증성을 다른 각도에서 해체합니다. 그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단일하고 투명한 '나'의 자기 확증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는 과정 자체에 내재된 미세한 균열, 차이, 그리고 비동일성을 드러내는 복잡한 활동입니다. 데카르트가 반성을 통해 '나=나'라는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바로 그 '생각'의 과정 안에 이미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불일치가 숨어있다고 봅니다.


들뢰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중체(doublet)' 라는 개념을 빌려옵니다. "내가 생각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나'와 그 생각의 대상이 되는 '나' 사이에는 완벽한 일치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는 미세한 시간적 차이, 인식의 간극, 즉 자기 자신과의 거리가 존재합니다. 데카르트가 이 간극을 '반성'이라는 행위를 통해 메우고 단단한 주체를 확립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바로 이 '틈', 이 '이중성'이야말로 주체가 고정된 자기 동일성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운동, 즉 '되기(becoming)'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봅니다. '반성'이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동일성을 찾으려 한다면, '되기'는 이 내부의 차이를 동력 삼아 외부와의 접속으로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 연인이 처음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이 선언은 단순히 내면의 감정을 반성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선언 이전의 '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아직 표현하지 않은 상태. 반성 속에서 망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선언이라는 '사건(event)': "사랑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단순한 내면 상태의 반영이 아니라, 관계의 현실을 바꾸는 수행적 행위가 됩니다.

선언 이후의 '나': 이제 '나'는 사랑을 고백한 주체가 됩니다. 이는 반성을 통해 얻어진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선언이라는 외부적 행위와 관계의 변화를 통해 새롭게 생성된 상태입니다. '나'는 이제 '사랑하는 주체-되기'의 과정으로 비연속적인 도약을 하며, 이전의 '나'와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변화는 고독한 반성이 아닌, 관계 속에서의 표현과 접속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사랑해"라는 선언은 주체 내부에 존재하는 '틈'(선언 전/후의 비동일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틈을 통해 주체가 새로운 관계적 배치(사랑하는 연인 관계)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되어가는(becoming)' 계기가 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자기와의 미세한 차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주체는 본질적으로 닫힌 반성적 존재가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열려 있고 유동적인 생성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주체는 미리 주어진 단단한 실체가 아닙니다. 그는 '되기(becoming)'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되기'는 A가 B가 된다는 목표 달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관계 맺고 변화하며 특정 상태-과정 속에 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선생님'이라는 직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지식, 교육 환경과 계속 상호작용하며 '선생님-되기'의 과정 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관점에서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주변 환경, 관계, 습관, 지식, 사물 등 다양한 요소들과의 '접속'을 통해 끊임없이 '조립(assembling)'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관계망의 구체적인 구성을 '배치(agencement/assemblage)'라고 불렀습니다. 나의 생각, 감정, 행동은 이런 '배치' 위에서 형성되고 변화합니다.




기존 자기계발의 한계: 왜 의지만으로는 부족할까?


그렇다면 자기계발은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자기계발 담론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주체관, 즉 '나'라는 고정되고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듯 보입니다. 변화의 핵심 동력을 개인의 '내면', 특히 '의지'나 '생각'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시 1: '마음가짐' 중심의 자기계발: 론다 번의 『시크릿』이나 나폴레온 힐의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 같은 책들은 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생각하고 믿으면 현실이 된다는 메시지를 통해, 변화의 주체를 개인의 '마음'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시 2: '긍정적 태도'와 '잠재력' 강조: 토니 로빈스의 저작들이나 '긍정 심리학' 기반의 일부 자기계발서 역시 개인의 신념 체계를 바꾸고 내면의 잠재력을 깨워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나'는 강력한 의지로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접근 외에도, 현대 사회에서 널리 퍼진 성격 유형론 역시 이러한 '고정된 자아' 관념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예시 3: MBTI와 혈액형 성격 이론: 많은 사람들이 MBTI나 혈액형 이론을 통해 자신을 특정 유형(예: "나는 내향적인 INFP야", "나는 B형이라 자유분방해")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도구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을 그 유형 안에 가두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I(내향형)이니까 사교적인 활동은 원래 못해"라고 선을 긋는 것은, 새로운 환경이나 관계('배치')를 통해 다른 모습의 '나'가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나'는 고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행동은 그 본질에서 비롯된다는 전통적 주체관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오롯이 개인의 내면(의지, 생각, 타고난 유형 등)으로 돌리는 접근은, 실패했을 때 개인의 나약함이나 부족함 탓으로 귀결되기 쉽습니다. 또한, 성공 역시 오롯이 개인의 뛰어난 능력이나 타고난 기질 덕분으로 여겨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 관계망, 사회적 조건, 몸의 상태 등 '배치'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나는 원래 외향적(E)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고립된 환경에 오래 놓이면 내향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듯이, '나'의 모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치'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자기계발의 가능성: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배치'를 바꾸는 것


들뢰즈적 관점을 빌린다면, 자기계발은 다음과 같은 전환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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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환경을 설계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원하는 '배치' 속으로 밀어 넣고, 관계 속에서 배우며 성장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중요하게 여겨져 온 '장인-제자 관계'나 '도제식 교육' 방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사례: 관계망 속에서의 배움과 성장 (농업, 요리, 학문)


적극적인 접속 시도: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유제우 씨가 농업을 배우기 위해 다감농원 강창국 대표를 무작정 찾아가거나, 요리 경험이 전무했던 이승현 셰프가 이력서를 들고 레스토랑 문을 두드린 행동은, 변화를 위해 스스로를 원하는 '배치' 속으로 던져 넣는 적극적인 '접속' 시도입니다. 이는 '언젠가 요리사가 되겠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주방이라는 환경, 셰프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요리사-되기(becoming-chef)'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배치' 속에서의 변화: 강창국 대표가 제자들을 단순 기술자가 아닌 '동지'로 여기며 1년 이상 함께 하기를 강조하거나, 이승현 셰프가 박태연 헤드 셰프에게서 '요리를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배운 것은, 기술 습득을 넘어 특정 '배치(농장, 주방)' 안에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며 주체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군대 요리 경험이 전문 주방에서는 무용지물임을 깨달은 김종근 씨의 사례처럼, '나'의 지식이나 능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 '배치'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재정의됩니다.


역사적 맥락: 이러한 관계 중심의 성장은 비단 현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지원이 신분과 당파를 넘어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발전시키거나, 정약용이 우둔함을 걱정하는 소년 황상에게 가르침을 주고 황상이 평생 스승을 받든 사례는,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지식과 인격 형성이 스승-제자라는 관계망(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줍니다.


현대적 변용: 안성재 셰프가 '제자' 대신 '동료'라는 표현을 선호하며 함께 일했던 이들의 성장에 감동하는 모습은, 전통적인 수직적 관계가 보다 수평적인 네트워크 관계로 변모하면서도 여전히 관계 속에서의 상호 성장이라는 핵심은 유지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나'라는 존재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망과 환경('배치') 속에서의 끊임없는 '접속'과 상호작용을 통해 배우고, 변화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이는 내면의 의지만 강조하는 전통적 자기계발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현실적이고 관계적인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 그는 "정체성은 반복된 행동(습관)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크릿』류의 책처럼 '생각'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배치')이 '나'를 구성한다는 관점입니다. 의지만으로 습관을 만들기보다, 습관을 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 – 예를 들어 운동복을 미리 꺼내놓거나, 건강한 간식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는 등 – 을 설계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아다치 유키히로의 『루틴의 힘』: 이 책 역시 의지력에 기대기보다, 일정한 '루틴' 즉,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환경('배치')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조율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내면의 의지를 다그치기보다 외부의 질서를 통해 안정감을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칼 뉴포트의 『딥 워크』나 『디지털 미니멀리즘』: 이 책들은 방해 요소를 차단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배치')을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스마트폰 알림을 끄거나, 작업 공간을 분리하는 등의 행위는 '의지력'만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집중을 방해하는 '접속'을 차단하고 몰입을 돕는 '접속'(깊은 작업)을 유도하는 환경 설정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변화를 위해서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기보다, 나를 둘러싼 '배치' – 즉, 나의 시간, 공간, 관계, 사용하는 도구, 접하는 정보 등을 의식적으로 점검하고 재구성하는 접근, 때로는 과감하게 새로운 '배치'에 합류하는 시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더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를 모색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나'라는 이중직조 - 생생한 접속과 깊은 반성으로 길어 올리는 '되기'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확고한 '나'를 찾으려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을 통해, 그 '나'가 고독한 반성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존재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성하고 의지를 가지는 내면의 힘을 완전히 무시해도 될까요?


어쩌면 진정한 해답은 데카르트적 '반성'과 들뢰즈적 '접속'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핵심은 이 두 가지 움직임이 어떻게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라는 복잡한 직물을 짜 내려가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중직조(dual weaving)'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실: 주체의 반성적 직조 (The Subject's Reflective Weaving) 이는 내 안을 들여다보는 힘입니다. 나의 가치, 욕망, 경험을 성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의식적으로 선택하려는 노력입니다. 타인의 평가, 심리학적 분류, 혹은 MBTI 같은 유형론이 내려주는 정의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다른 하나의 실: 네트워크의 생생한 접속 직조 (The Network's Vivid Connective Weaving) 이는 외부 세계와 적극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관계 맺는 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접속'은 단순히 온라인 상태를 유지하거나 SNS 피드를 넘기는 피상적인 연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의 표정, 목소리 톤, 몸짓을 생생하게 느끼고, 대화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하는지(언제 마음이 시작되는지) 함께 관찰할 수 있는, 만질 수 있고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만남과 연결입니다. 장인을 찾아갔던 제자들처럼, 구체적인 '배치'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들뢰즈적 생성의 강력한 동력입니다.


이 두 가지 직조는 따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반성 없는 생생한 접속은 외부 환경과 경험에 그저 표류하며 방향을 잃게 만들 수 있고, 접속 없는 깊은 반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자기 위안에 머무를 위험이 있습니다. 진정한 '되기(becoming)'는 이 '이중직조' 속에서 일어납니다. 즉, 생생한 만남과 경험(네트워크적 직조)을 통해 얻은 살아있는 재료들을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성찰하고(반성적 직조), 그 성찰을 바탕으로 다시 어떤 구체적인 접속을 선택하고 만들어갈지 결정하는 끊임없는 순환 과정입니다.


이 두 실은 때로는 부드럽게 엮이지만, 때로는 서로를 당기며 팽팽한 긴장을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친 접속의 경험이 내면의 성찰을 뒤흔들고, 어떤 날은 깊은 반성이 새로운 만남을 주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라는 직물은 바로 이 예측 불가능한 춤, 이 섬세한 갈등과 조화 속에서 짜여 나갑니다.


어쩌면 이러한 깊고 관찰적인, 때로는 서툴고 불편할 수 있는 실제적 접속이야말로, 디지털 화면 속 매끄럽고 효율적인 소통 방식에 익숙해진 현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가 잃어버렸거나 가장 어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생생한 마주침 속에 변화의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디지털 화면 뒤의 안전함을 벗어나,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취약함을 무릅쓰고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미는 것. 예측 불가능한 대화 속에서 나의 밑낯을 드러내는 것. 이것은 단지 소통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용기를 요구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용기 있는 접속의 순간에, 굳어있던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굳어버린 '나'의 정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변화하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한쪽으로의 치우침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직조를 의식적으로 함께 수행하는 것입니다. 외부의 정의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딱지를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용기 내어 생생한 만남(접속) 속으로 뛰어들되, 그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성찰(반성) 하며 자신만의 길을 짜 내려가십시오.


자기 돌봄과 성장은 타인이나 시스템이 재단해준 기성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반성과 생생한 접속이라는 두 개의 실로 나만의 삶이라는 옷감을 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바로 그 섬세하고 역동적인 이중직조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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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두려워 말고 만남의 장으로 뛰어들어 직조를 시작하라. 당신이라는 걸작은, 바로 그 서툴지만 용기 있는 손길 속에서 탄생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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