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영혼의 물리학 - 1
길을 가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가는 사람에게 무거운 바위를 들라 재촉하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임금을 받기로 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아마 그를 저지하거나 비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문제에 있어 우리는 매일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 마음이 힘겨운 사람에게 ‘왜 너는 다른 사람처럼 견디지 못하느냐’고 질책하거나, ‘왜 다른 아이처럼 의지가 강하지 않으냐’고 다그치는 것이다. 마음에 관해 알지 못해 때로는 이런 폭력을 자신에게 휘두르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마음이 아무런 구조도 원리도 없이 그냥 작동하는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함부로 다룬다. 하지만 마음도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몸과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자체 원인으로 문제를 겪는다. 마음도 물질이라서 물리적 원리에 따라 소모되고 보강된다.
앞에서 우리는 영혼도 일종의 에너지장이라 가정했다. 그런데 영혼이 에너지장이면 몸과 마음의 구분이 매우 모호해진다. 물리적으로 에너지와 물질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혼과 마음도 물질'이라는 뜻이 된다.
(물질-에너지 관계는 'E=mc^2이 준 깨달음' 참조)
물론 과거의 철학자나 성인들은 마음이 비물질이라 가르치셨다. 하지만 당시는 에너지나 공기(空氣)조차 알지 못하던 시대다. 마음이 정말로 '무無'나 '공空'이라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셨을 것이다. 그 분들도 무언가 실재함을 아셨지만, 지시할 개념이 없어서 '공空'이라거나 '영(靈)'이라거나 비실재라는 표현을 쓰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실제로 불교 경전에서 마음을 '극미세'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양자역학이 발전한 21세기에 와서까지 과거의 개념틀에 갇힐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마음을 에너지로, 즉 실재적인 물질로 여기면서도 얼마든지 그 분들의 가르침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미 서구 철학자들은 다양체와 벡터(마누엘 데란다), 다중체와 매듭(토머스 네일) 등 수학과 물리학 책에나 등장할 법한 차원과 에너지 개념으로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주창했던 이분법적 사고는 이미 역사의 유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데카르트식 사고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손에 쥔 핸드폰만 첨단일 뿐, 사고방식은 여전히 400년 전 관념 안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서구가 쓰다 버린 낡은 틀을 우리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지금은, 우리만의 세계관을 정립해 세계 문화를 이끌 기회다. 더구나 K-문화를 넘어 K-사상을 잉태할 수 있는 놀라운 깊이가 이미 우리 문화 안에 있다.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어 가는 이 시대를 다시 일으키는 일은 앞선 문화를 이끌어 온 한국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전통은 미개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우리다운 눈과 생각으로 '마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다시 보는 몸과 마음의 관계
서구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풀기 어려웠던 것은 정신을 비물질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도 일종의 물리적 에너지라 생각했던 우리에게는 일원론이니 이원론이니 하는 논쟁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철학에서 마음의 문제를 따로 논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재료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이야기가 경험적으로는 잘 와닿지 않는다. 실제 경험에 있어서는 육체적 감각과 정신적 감각이 매우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간단한 비유만으로도 곧 이해된다.
몸과 마음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아마도 얼음과 수증기일 것이다. 얼음과 수증기는 질료가 같다. 다만 그 질료(물 분자)의 운동이 활발하면 수증기가 되고, 온도가 낮아지면 얼음이 된다. 그러니까 둘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그 존재 상태에 따라 속성은 완전히 다르다. 얼음은 형태가 있고 수증기는 형태가 없으며, 얼음은 차게 느껴지고 수증기는 차게 느껴지지 않는다. 즉 얼음과 수증기는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몸과 마음의 관계도 이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얼음과 수증기로 이루어진 몸에 외부에서 자극이 가해지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망치로 내리친다고 해 보자.
외부에서 힘을 가하면 견고한 물체는 그것을 '충격'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큰 힘이 가해지면, 얼음은 그 충격으로 형태가 파괴되는 변화를 겪는다. 즉, 견고한 물체에게는 외부 에너지가 '파괴 혹은 보존'을 결정하는 '힘'으로 인식된다. 책상에 부딪쳤을 때, 멍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수증기는 상황이 좀 다르다. 수증기는 파괴될 견고함이 없기 때문에, 망치로 내리쳐도 파괴되지 않는다. 대신 수증기는 급격한 진동의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정신이 아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의 정신도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물결이 치듯 입자가 흩어지고 파동이 흔들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우리는 아마도 '불안', '혼란' 등의 심리적 어휘로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즉, 전해지는 느낌이 달라서 각기 다른 어휘를 사용하고, 그에 따라 '몸과 마음'이라는 견고한 인식적 구분을 세우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몸과 마음이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몸으로 느껴지는 변화를 육체적 감각이라 말하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변화를 마음의 감각이라 부르며 구분한다. 하지만 미시 차원까지 고려해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이 일종의 '물질적 몸'으로서 외부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육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존재 전체, 일종의 존재장이라 할 존재 구조 전체가 실질적인 '나의 몸'인 셈이다.
현대적이고 통합적이고 동적인 '나'와 만나기
육체와 정신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입자'라 불릴 만한 물질 혹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밀도가 높고 조밀해서 거시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영역을 육체로 인식하고, 조금 더 미세하고 자유로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외부 자극을 '힘'이 아니라 '진동의 변화'로 느끼는 영역을 정신 영역이라 인식할 뿐이다.
우리에게 몸과 정신이 모두 필요한 것은, 우주가 각기 다른 진동과 밀도의 다양한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돌멩이도 있고, 극미세의 아원자도 존재한다. 그래서 그 우주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돌멩이를 감각할 육체도 필요하고, 육체로는 변별하기 어려운 미세 진동을 감각할 정신 구조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에너지의 진동이 영혼(神)에는 '정보 변화'로 인식될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유'라 부르는 정보 처리의 데이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결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다만, 그는 연속되는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취함으로써 하나의 실체를 둘로 나누는 오류를 범했는데, 에너지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후예로 출발한 과학은 현재 육체를 존재의 전부로 규정한다. 하지만 의욕(마음 에너지)이 활력(육체 에너지)을 불러일으키고, 활력이 의욕을 되살리는 일상의 경험을 생각해 본다면, 몸과 마음이 하나의 통합적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주장일 것이다.
※ 짧은 요약
몸과 마음은 감각적으로 다르게 느껴질 뿐, 하나의 통합적 시스템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몸과 마음의 작용 원리가 동일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