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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예정 Aug 17. 2023

거리, 맥주, 열대야

그렇게 조금씩 흘러가는 것들


대학로에 다녀왔다.


꽤 오래 전 우리는 이 술집에서 밤을 샌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고 단 게 땡긴다며 컵커피를 마셨었다. 평소답지 않게 과음해서 했던 얘기를 또 하기도 하고 더운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첫 차를 타러 함께 걸어가던 이른 아침의 풍경이 여전히 선명하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일들이다. 물론 여전히 못할 일은 아니기는 하다.


열대야 때문인가. 더운 공기 속을 걸으며 여기도 참 많이 변했다는 말을 나누었다. 전철역까지 지나온 거리는 짧았지만 나는 그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일주일에 몇 번이고 이곳을 찾던 때가 있었다. 공연을 보려고, 근처에 친한 친구가 살아서, 아니 그냥 그 동네의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찾을 때는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흔히 간판이 하나 둘 달라질 땐 그게 변화라고 인식하지 못하니까. 얼마간 뚝 떨어진 채 지내다 불쑥 들어섰을 때 거리를 점유한 가게들 대부분이 전환됐을 때야 어, 여기가... 하면서 예전 모습을 가늠하게 된다.  어젯밤이 그랬다. 정말 많이 달라졌네, 하면서도 뭐가 달라졌지, 하면서 고개를 여러번 두리번 거렸다. 얼마 전에도 나는 그 거리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 때는 목적지에 가기 급급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어제에서야 겨우 나는 내가 간직한 풍경이 꽤나 낡아버렸다는 걸 깨달은 셈이다.


쓸쓸할 일인가.


술에 약한 나는 겨우 맥주 500을 먹고 취했다. 얼마 전 친구들에게 나는 오늘을 지우고 싶을 때 술을 마신단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알콜이 조금만 들어가도 어김없이 의식이 조기종영 되기 때문에 하루가 엉망이라 빨리 잠들고 싶은 날에 술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혼술에만 해당되는 얘기이고, 나는 혼자 술을 먹는 취미가 없기 때문에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대체로 술을 마실 때 나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거나 술을 마시고 싶은 분위기 속에 있으며, 그 때의 분위기는 대체로 유쾌하다.


어제도 유쾌하게 취했다. 그리고 흔히 하는 표현으로 '여름이었다'. 여름밤에 굳이 쓸쓸해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언뜻 옛날 생각들을 했다. 옛생각을 하면 나이 든 거라던데 정말 이젠 나이가 들어가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꽤 멀어진 20대를 아직도 가깝게 기억하는 내가 좀 웃기기도 했다. 그 사이 해놓은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하긴 나도 몰랐지, 시간이 그냥 두기만 해도 이렇게 흘러가는 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닫는 때가 오자, 자연스럽게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았던 때가 가끔 그리워진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미래로 나아가는 동시에 미지의 가능성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이라는 걸 그 때는 몰랐다. 허황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꽤 그럴듯한 착각이었다. 그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젠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 정도.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


시간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은 늘 버겁다. 어떤 날은 급류에 휩쓸려 알 수 없는 지점까지 떠밀려 온 느낌이다. 분명히 아는 곳인데 왠지 모르는 듯한, 분명히 겪었던 일 같은데 여전히 서툴기만한. 쉴 새 없는 변화와 낯섦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나의 강이 깊어지면, 물이 아무리 빠르게 흐른들 적어도 수면 위는 잔잔한듯 어른의 미소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입추가 지났다. 여름이 가고 있다. 더위가 가시는 일이 기다려지기도, 조금은 겁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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