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내려놓자, '지금'을
2025년 12월 02일 오전 10시 30분
"어머, 크리스마스네요"
화실에 도착하니 캐럴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틀어봤어~"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진하게 커피를 한 잔 타들고, 자리에 앉아서 연필을 잡았다.
한참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가 한 마디, 두 마디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글쎄, 유치원 입학인데, 면접을 봐야 한대요!"
"수능 끝나면 끝인 줄 알았더니, 쇼핑하고 맛있는 거 먹이느라 허리가 휘어요."
"애들 키우는 건 정말이지, 자랄수록 끝도 없더라고요."
다들 육아하는 게 만만하지가 않다.
나이가 어리건, 많건 간에 이놈의 엄마 일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사각, 사각 선 하나, 선 둘 그어가며 시름도 하나, 둘 털어놓는다.
털어놓는다고 뭐 달라지는 건 없다. 다 같이 한숨 쉬며 속상함을 나눌 뿐.
두런두런 끝에 잠시 침묵.
그 정적을 비집고 캐럴이 다시 흘러들어왔다.
문득, 선생님이 젊었을 적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선생님, 혹시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보셨어요?"
"크리스마스 마켓? 글쎄... 음... 가봤는데 어디였더라..?"
"정말요? 어땠어요? 그런 데서는 뭘 팔아요?"
"다른 건 기억 안 나는데, 글루바인 사 먹으려고 갔던 것 같아요."
"그거 따뜻한 와인 아니에요?"
"맞아요. 글루바인을 마시고 취했던 것들이 생각나네."
"선생님, 그거 무알콜 아니에요? 데우면 알코올이 다 날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거 엄청 취해!"
선생님의 이야기에 캐럴이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나는 어느새 뉴욕 한복판에서 글루바인을 잔뜩 마신채, 크리스마스 마켓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아까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마치 핫초코 속의 마시멜로처럼 흔적도 없이 스며들어 녹아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부드럽게 흐르는 캐럴뿐이었다.
그러나 화실 밖을 나서자, 마법이 사라졌다.
쌀쌀한 겨울 공기에 옷깃을 한껏 여미고 집으로 향했다.
날이 너무 추워서 감기가 걸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당장, 저녁에는 뭘 해먹을지 고민이 되었다.
걱정과 현실이 다시 나를 덮어왔다.
집에 도착했다. 공기는 따뜻했지만, 내 마음속은 왠지 휑했다.
띠링, 띠링, 문자로 날아오는 학원비 고지서부터, 다음 주 집안 행사, 큰 애 시험기간까지 모든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앞으로 돈 들 일이 더 많을 텐데, 내가 화실을 다녀도 되나.
괜스레 우울해지기까지 하네.
따뜻한 물을 끓였다. 차나 마셔야겠다 싶어서.
'띵동'
둘째가 돌아왔다.
"엄마! 오늘 내가 피아노 학원에서 뭐를 배웠는지 알아요?"
"뭔데?"
"이거 바바요! 들어봐요!"
둘째는 피아노의 붉은 커버를 벗겨내더니, 오른손으로 뚱땅뚱땅 음을 쳐내기 시작했다.
"아이, 나 아직 오른손밖에 못하기는 하는데~"
서툴지만 또렷한 멜로디가 이어졌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둘째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그러자 나는 또 마법처럼, 뉴욕 한가운데의 크리스마스마켓에서 글루바인을 들고 있었다.
아예 눈을 감고,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뚱땅거리는 소리 속에서 모든 걱정은 또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걱정해 봤자 뭐 해. 그냥 연말을 즐기자.'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시기.
하지만 현실적으로 연말과 새해는 제일 돈도 없고, 할 일은 엄청 많고, 방학이 겹친 탓에 늘 피곤하다.
그럴 때는, 캐럴을 들어보자.
캐럴은 마치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처럼, 잠깐이나마 행복한 환상을 불러온다.
울려 퍼지는 소리에 현실을 잠시 잊고, 상상 속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뉴욕의 크리스마스는 말이야, 어른도 꿈을 꾸게 하는 힘이 있어. 마치 아이처럼 말이야."
선생님의 몽환적인 말을 떠올리며,
캐럴을 틀어보는 오늘이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존이냐 박이냐 님의 캐럴모음입니다.
같이 들어요.
화실에서 집에 오는 길에 잠시 들른 스타벅스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들.
-선생님은 크리스마켓이 뉴욕이라고 말하신 적은 없습니다만, 제 멋대로 뉴욕으로 상상했습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