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이 안 보여요...
예약시간 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이곳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이다. 아치형태의 입구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개방되어 있는 입구안쪽으로는 바로 정원이 있는데, 식탁들이 어지러이 놓여있고, 흐드러지게 핀 하얀 수국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프랑스 할머니가 손주들을 초대해서 정성껏 가꾼 정원에서 한 끼 대접할 것만 같다. 나는 아쉽지만 정원 말고, 안쪽으로 안내받았다.
오랜만에 예쁜 곳에 오니 마음이 설레었다.
오늘 만남을 위해, 감히 미니스커트를 선택했고, 롱부츠를 신었다. 평소에 입지 않는 옷들을 입었더니 무언가 몸가짐이 수줍었다. 괜찮게 입고 싶었다. 무슨 데이트도 아닌데 마음에 분홍 물이 들었다.
기다리고 있으니 한 명, 두 명 도착소식을 보내온다.
자리에 앉아 반갑게 맞이하다 보니 내 마음에만 분홍 물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목소리들이 조금씩 격양되어 있다. 옷차림들이 알록달록하다.
왜 이렇게 이뻐졌어, 늙지도 않네.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잘 있었어?
오가는 반가운 말들에 마음이 조금씩 들뜨던 즈음,
깔끔하게 잘 꾸민, 베일 것 같은 오뚝한 콧날의 잘생긴 총각이 은은한 향수내음을 풍기며 다가와 정중하게 말한다.
"예약자분들은 와인 2인 1병 필수로 드셔야 합니다."
"오늘 손님이 많으셔서 2시간으로 식사시간을 제한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서로 마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예약할 때 와인 2인 1병이라는 문구가 있었나?
우리는 모두 4인인데 그러면 두 시간 동안 한 사람당 와인 반 병을 마셔야 하네.
핫플의 룰인가 보다.
핫플에 오면 치러야 할 값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우리는 소위 '알쓰'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알코올 쓰레기'라나.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다.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이야 좋지만
와인 한 병을 두 명이서 두 시간 안에 비워내야 하는 미션은 부담스럽다.
" 젊은이들은 청춘이라 이 정도는 먹을 수 있나 보다."
" 자 각자 본인의 간에게 텔레파시 전달식이 있겠습니다. '얘들아 힘내' 하고 보내주세요."
에잇. 까짓 거.
1인당 2만 원의 예약금을 내고 예약을 했고, 예약을 한 테이블은 꼭 와인을 2인 1병 마셔야 하는 것이 이곳의 룰이라니. 반대로 생각하면 언제 또 이렇게 마셔보겠어 싶어서 호기롭게 메뉴판을 펼쳤다.
아휴, 그런데 메뉴이름들의 크기가 흰색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인가 간신히 구분이 될 정도의 사이즈다.
"아 중년의 눈은 힘을 내지 못하고 있네요(중계톤으로)~~ 글씨가 깨알이다. 보이지가 않네."
"핫플 오는데 체면 떨어지게 안경 가져올 수 없어서 안 가져왔어."
"어휴 뭐라고 쓰여있는 거야. 게다가 또 영어야?"
"이리 줘봐. 이런 건 이렇게 하는 거야."
일행 중 한 명이 메뉴판을 카메라로 착 찍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휘덕 휘덕. 늘린다.
돋보기 대신에 이렇게 확대해서 메뉴판을 본다. 더듬더듬 간신히 주문을 마친다.
"늙은이는 오지도 말라는 거야 뭐야."
"아 서러워서 살겠나."
"저기요 큰 글씨 메뉴판 좀 만들어 주세요."
뭐래. 진짜.
오해하지 마시길. 물론 우리끼리 한 이야기니까.
못 산다 아주미들. 주책이다 진짜.
"우리 소리 좀 줄여야 하는 거 아냐. 이러다가 두 시간도 못 채우고 쫓겨나는 거 아냐"
"아니 그럼 와인 테이크 아웃해서 병나발 불면서 길거리 다니는 거야?"
우리의 만남에 참말로 여러 시련이 있지만 그 모든 시련은 이런 식으로 깔깔깔깔 웃음소리에 묻혀 휘릭휘릭 넘어가곤 한다. 와인 두 시간에 반 병? 난 알쓰지만 해 낼 수 있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네.
취기가 슥 오르고 기분도 슥 오른다.
화이트 와인 한 병. 레드 와인 한 병.
와인잔에 떨어지는 신의 물방울을 바라본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아무튼 좋은 향이 분위기와 섞여 감미롭다. 파스타의 익힘 정도가 알'덴'테로 매우 이븐 하다. 소스가 나야, 크림. 나지막이 외치던 크림 리소토도.
치즈가 듬뿍 들어있는 토마토 수프도. 와플과 스크램블, 통베이컨이 곁들여진 근사한 브런치 플레이트도. 너무 완벽했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쫓기는 느낌에 와인잔을 비우느라, 대화가 깊이 무르익을 수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좋기도 했다. 진지해질 새 없이 가볍게 툭툭 오가는 이야기들이 편했다. 테이블 구석구석 경쾌한 에너지가 통통 튀어 다닌다.
좋다. 너무 좋아.
얼큰하게 취해서 두 시간 만에 쫓겨나듯이 핫플을 나온다. 술도 깰 겸, 구경을 다니기로 한다.
알코올이 보우하사 원래보다 훨씬 더 알록달록한 모습의 세상이 나를 반긴다. 진열대에 전시된 귀여운 양말이 말을 거네.
"엄마. 나를 사가세요."
어라, 너 왜 우리 큰애 목소리를 내는 거니? 잠깐만,
아니 하지만 너는 너무 비싼 양말인 걸? 내 평생 한 쌍에 만 원짜리 양말을 살면서 사 본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너무 예쁘긴 하잖아? 너를 사가라고? 에라 모르겠다! 그래 나랑 같이 가자.
그렇게 데려 온 양말은 큰 애의 최애 양말이 되었다. 엄마가 자기 생각하면서 사온 '비싼' 양말이라며. 아껴 신는다. 한 잔 안 했으면 안 사 왔을 텐데. 이것이 바로 만원의 행복인가...
살짝 양발이 꼬이고, 양볼이 붉어져 살짝 흐려진 시야에 인상을 쓴다. 그 상태에서도 뭐라도 눈에 담겠다고 이 가게 저 가게를 구경한다. 유명한 스투시 매장도 들어가 보고, 맞은편 테니스복을 파는 매장도 들어가 보고.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에서는 예쁜 목걸이를 확 집어 들어 계산도 한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찌푸린 눈빛으로 걱정을 했다면, 그러지 마시라!
팔다리를 휘적이며 고주망태 같은 작태로 누비고 다닌 것은 아니다. 이래 봬도 우리는 품위를 절대 잃지 않는 레이디올시다. 애당초 평상시에 와인을 그렇게 급하게 마셔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네. 그래서 경험이 없다 보니, 잠시 조금 더 들뜨고, 약간 더 흥분했을 뿐이오.
마젠타빛의 진핑크벽돌벽. 맘마미아 포스터가 걸려있고, 역시 꽃이 만개해 있다.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어느 귀족집 영애의 별장 같아 보이는 카페의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벌건 대낮 주말에 삼삼오오 모여 낮술이나 퍼마시다가, 비싼 커피에 모양 나는 케이크 시켜서 앉아서 수다나 떨고 있는 팔자 좋은 여자들 같아 보이시는가?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덩굴이 늘어져 있는, 노란 조명 아래, 프랑스풍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서 차와 디저트를 시켰다. 곧이어 내어 온 쌉쌀한 커피 향에 달큼한 술내음이 지워져 간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 혹시라도 대화를 엿듣는 다면, 예상한 내용과 사뭇 다를 것이다. 아마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스윽 떨구고 팔자 좋다는 생각은 뒤켠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팔자 좋지 않다.
십 년이 넘게 알고 지낸 사이다. 아니 이제 이십 년이 넘어가는 것 같다. 이십 대에 만나 이십 년이 넘어가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각 가정에는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마음속에 푹 박혀 빠지지 않는 돌멩이 같은 사연들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쓰라린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각자의 돌멩이를 꺼내어 보여준다.
케이크 한 입에. 달콤한 라테 한 입에. 돌멩이를 녹여 없애보려 애를 쓰느라 열심히 포크질을 해 본다.
손을 잡아주고. 같이 눈물도 흘리고. 얼마나 힘들었니, 다 잘될 거야
엄마이자 아내이자 딸이기도 한 터라, 각 자리의 수만큼, 아니 때로는 그 수의 몇 배만큼, 어깨가 빠질 만큼 무거운 사연들을 한 짐씩 짊어지고 있다.
그 사연들을 가볍거나 혹은 무거운 걸로 나누지 않는다. 내가 더 힘들다 네가 더 힘들다 배틀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하나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나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 당신에게는 별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충분히 아는 나이이다.
네 이야기가 내 이야기고, 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
그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웃을 수 있는 나이다.
맨 처음 장소에서 맞닥뜨린 상황을 되짚어 보자.
두 시간 동안 와인 두 병을 네 명이서 모조리 마셔버려야 한다.
아가씨 때라면 화를 벌컥 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술도 못 마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마실 수 있냐며, 예약할 때부터 울컥하여 어쩌면 그 장소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웃긴다. 그걸 모르고 예약한 그 상황도 웃기고,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꾸역꾸역 마셔대는 것도 우습고.
다 마신 뒤, 들썩거리는 몸놀림으로 애써 흐린 눈을 힘주어 떠가며 구경하는 것도, 너무너무 웃긴다.
메뉴판을 볼 때 눈이 안 보여서 인상을 팍팍 쓰고 있는 모습도 너무너무 웃겨서
그저 깔깔깔깔.
우리가 모이면 이렇게 낙엽만 굴러가도 웃긴다.
어깨에 늘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엄마라는 이름의 책임감도 같이 웃음소리에 낙엽처럼 바람에 굴러간다.
말이 안 통하는 남편도, 시집살이 톡톡히 시키는 시어머니도.
애정결핍에 사춘기까지 맞이한 딸내미도,
그놈의 지겨운 오늘 저녁 뭐 먹을까 하는 고민도.
다 굴러가버린다.
시간이 그럴 수 있는 지혜로움을 나누어 주었기에.
비록 우리에게 노안을 선사해, 메뉴판도 안 보여, 돋보기를 찾게 해 대망신을 하사해 준 세월이지만.
그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기꺼이 보듬어 안고 예뻐해 줄 수 있는 짬이 우리에게는 있다.
얼마 전부터 너무 먹고 싶었지만 애들 눈치가 보이고, 남편 하고는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사 먹던 골뱅이탕과. 회를 너무 좋아하지만 집안에 아무도 먹는 사람이 없어서 매번 다른 가족들에게 메뉴선택권을 넘겨주어야 했던 언니가 너무도 먹고 싶어 했었던 잡어회를 안주삼아 마지막으로 아쉬운 맥주 한 잔을 맞대어 건배를 한다.
보글보글. 탕이 끓는다. 연기가 올라간다. 매큰한 청양고추 냄새, 바다향 한가득 품은 골뱅이를 품고 훌훌. 우리의 사연도 품고 훌훌.
한 껏 가벼워진 어깨를 들어 올려, 빈자리에 다시 사연을 실으러 돌아간다.
우리는 또 몇 달 뒤 만나. 다시금 무거워진 짐을 털어줄 것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우리 다시 만나. 그때 또 어깨를 비우고, 예쁘디예쁜 추억으로 자리를 채우자.
다음에는 어디서 만날까?
요새 을지로가 힙하다는 데, 거긴 어때?
좋아. 어디든 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