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 늦은 밤 11시. 선고를 앞둔 의정부지방법원 제1호 법정. 재판부와 함께 12시간 동안 법정을 지키느라 배심원 8명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재판장 이영환 부장판사의 목소리가 법정에서 울려퍼졌다. “직업 법관들과 국민들의 생각이 다른 지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배심원들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법정이 술렁였고 재판장은 말을 이었다.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곧바로 설명이 이어졌다. “배심원들의 의견은 합당했고, 합리적인 범주 내에 있다고 판단하여 우리 법원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검사석에 앉은 검사 두 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얼굴은 붉었고, 시선은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이에 재판장은 “실망스러우실 거 같은데, 검사 측의 준비가 미흡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무죄판결이 되어야 할 사건이 유능한 검사로 인해 유죄가 된다면 그게 더 나쁜 걸지도 모르겠다”며 선을 그었다. 또한 “일부 결론은 직업 법관의 결론과 다른 부분이 있으나, 이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된다”고 당부했다.
법관의 판결과 국민의 법감정이 마주보는 순간이었다. 이날 불륜 상대 여성을 폭행⋅협박한 혐의를 받은 전 부인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피해자는 전치 2주의 엄지손가락 골절을 입고, 23회의 협박 문자를 받았다. 그러나 무죄였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변론했던 전 아내 측 주장을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배심원들에게 질문도 하며 분위기 이끌던 '그 검사'
격렬하게 부딪혀오느라 멀어진 법관과 국민의 법 감정이었지만, 이날은 아주 가까웠다. 재판부는 배심원의 판단까지 수용했다. 그렇다고 매번 재판장 혼자만 국민에게 다가가는 건 아니었다. 사법기관 전체가 움직였다. 법원이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판을 깔아주니 공판검사도 다른 법정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을 여럿 보였다.
10월 23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이 그랬다. 406호 대법정. 공판검사를 맡은 윤경 검사는 배심원 측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법정 한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배심원 여러분! 형사재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배심원 8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공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고 유창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윤 검사는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점을 이용한 피고인의 감정 호소에 재판 결과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 뒤 변호인 측의 변론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부정했다. 어려운 법정 용어는 없었다. 모두 쉬운 일상어였다. PPT도 함께 넘겨가며 설명했다. 배심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결국 40년지기 친구 대표이사의 회삿돈 5억 218만원을 횡령한 피고인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역시 배심원 만장일치로 법원과 판단을 같이했다.
차갑기만 한 법원? 내겐 사람 냄새 풍기던 '그곳'
판결은 무거웠으나, 그렇다고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같던 법정은 아니었다. 자비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차가운 법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냄새 풀풀 풍겼던 순간이 많았다.
이날 재판장 오상용 부장판사도 배심원들과 평의에 들어가기 전 변호인 측에 “잠시 후 선고할 때 변호사 두 분 중 적어도 한 분은 피고인과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죄 선고가 날 것에 대비한 부탁이었다. 변호사들은 “둘 다 함께 있겠다”고 답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피고인과 변호사들은 앉지도 않고 법정 입구를 갸웃거렸다. 변호사 중 한 명은 피고인에게 “마음의 준비 하시라”며 위로하기도 했다. 실형이 내려지는 순간 피고인은 잠자코 듣더니, 이어 아무런 반항 없이 법정 구속됐다. “대단히 죄송하다”고 했던 피고인은 죗값을 치르러 갈 때 되려 편안해 보였다.
농담을 건네는 재판장도 있었다. ‘평의 전에 미리 토론하면 안 된다’는 딱딱한 안내사항을 건넬 때 조차 “식사하실 때 사건 이야기하지 마시고, 날씨나 연애 이야기 하시라”고 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에게 사과하며 "미안하다" 사과하던 사려 깊은 판사님
그런가 하면 초등학생들에게 사과한 재판장도 있었다. 10월 18일 수원지방법원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식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사건에서 수원지방법원 재판장 송승용 부장판사는 자극적인 사건을 방청하게 한 이유로 초등학생들에게 사과했다. 검사가 피해자의 몸에 칼날이 몇 cm나 들어갔는지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재판장은 이때 갑자기 재판을 멈췄다. 이어 인솔자를 통해 “초등학생들은 퇴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인솔자의 의사에 따라 원하지 않는 내용을 듣게 하는 것은 아동학대일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인솔자가 “이미 내용을 들어서 알고왔다”고 했으나, 재판장은 거듭 “미리 조치를 취하지 못해 미안하다”라며 “나가달라”고 했다.
방청하러 온 초등학생 6명은 머쓱해했지만, 곧 법원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다른 법정을 찾아나갔다.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재판장은 초등학생 6명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다시 재판을 이어갔다.
아쉬웠던 순간⋯ 공지사항 그대로 따라 읽던 판사
아쉬운 순간도 있었다.
10월 30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이다. 이날 재판장 마성영 부장판사는 배심원 10명에게 간단한 안내사항이나 인사 없이 곧바로 검사에게 “증인신문 시작하세요”라고 말했다. 평의에 들어가기 전 배심원들에 안내하는 사항 역시 법원이 일괄적으로 내린 공지사항을 보여주며 “이렇게 되어있다”며 그대로 따라읽는 정도였다.
그 법정에 들어선 순간, 모두가 법원의 ‘대표’
4번의 국민참여재판에서 마주한 배심원들은 ‘법잘알’들과 모두 어깨를 나란히 했다. 표정은 생생했고, 질문은 날카로웠으며, 때로는 영화 ‘배심원들’보다 더 영화 같았다. 나이도, 성별도, 살아온 인생도 모두 달랐지만 배심원이 되는 순간에는 모두 눈빛이 같았다. 표적은 사건의 진실이었다.
그 열의와 최선 앞에서 전문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에 재판장들도 “법원을 대표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재판을 마치는 일이 잦았다. 완전한 하루를 재판에 다 쏟아부은 배심원들 역시 “고생하십니다”라며 나왔다.
도입 11년.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제도를 만들겠다’는 국민참여재판 제도의 취지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악용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법농단’ 이후 ‘사법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뿌리내린 지금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법알못’을 법정에 당당히 세워준, 또한 배심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한 법원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