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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래 Feb 23. 2024

#1_오리손 산장에서의 하룻밤

더없이 완벽했던 하루 (23/08/05)


프랑스 하면 누구나 먼저 파리를 떠올릴 것이다. 파리를 제외한 다른 도시를 대보라고 하면 살짝 뜸을 들이다 휴양지인 니스나 마르세유, 영화제로 유명한 칸 정도를 말할 것이다. 와인을 좋아하면 보르도나 부르고뉴를, 축구를 좋아하면 리옹을 추가하는 정도가 아닐까? 실은 내 이야기다. 그러다 프랑스길을 걷기로 하면서 생장과 바욘, 비아리츠라는 동네를 새롭게 알게 됐다.


산티아고 프랑스길은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 이하 생장) 라는 곳이 시작점이다. 생장은 서울의 압구정동 만한 면적에 15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동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초입에 있어 아주 가깝게는 큰 도시가 없을뿐더러, 대도시에서 한 번에 연결되는 교통편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인근의 바욘이라는 도시를 경유한다. 생장을 가려면 일단 바욘부터 가야 하니 대부분의 순례자는 바욘 가는 법을 찾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바욘과 먼저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도 다른 순례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바욘에는 TGV를 타고 가는 경우가 가장 많고, 더러는 비행기를 타고 좀 더 드물게는 버스를 타기도 한다. TGV는 빠르지만 비싸고, 버스는 싸지만 오래 걸리고 힘들다. 유럽 내에서는 저가 항공을 이용할 경우 20~30 유로에도 나라를 넘나들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선 비행기가 가장 싸고 편한 방법이 된다. 가까운 공항에 비아리츠 직항편 저가 항공이 취항해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 우리는 독일 쾰른에서 바욘 인근의 비아리츠 공항까지 한 번에 날랐고, 30~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나와 바욘역 근처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비아리츠는 프랑스 최초의 서핑 해변으로, 유럽의 캘리포니아로 불리기도 한다. 19세기엔 유럽의 왕족과 귀족의 휴양지로 이름을 날렸으며, 20세기엔 코코 샤넬과 피카소가 이곳에 머물며 영감을 얻고 작품 활동을 했단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비아리츠인데 이렇게 버스 안에서 스쳐 지나치려니, 그저 바욘에서 밥 한 끼 겨우 먹고 잠만 자고 떠나야 한다니 조금 억울했다. 솜사탕을 물에 씻어 먹으려다 속절없이 잃어버린 너구리의 심정이 이랬을까. 유연한 여행을 좋아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엔 평소와 달리 철저히 준비한답시고 순례길 첫날의 숙소까지 예약을 하고 말았다. 약속을 지키러 가야만 한다. 그래, 이번 여행의 메인은 순례길이니 한눈팔지 말고 가자, 가버리자. 순례가 끝나고 귀국하기까지 약 3주쯤 여유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 꼭 다시 프랑스에 오자고 약속하며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었다.


아침의 바욘 역엔 이름도 국적도 모르지만 순례자인 것만큼은 알겠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내가 탄 열차의 70~80%는 순례자였다. 배낭을 메고, 트레킹화를 신은 사람들. 처음 가는 곳이지만 내릴 역이나 내려서 찾아가야 할 곳은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다. 우르르 내리는 곳에 따라 내려서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쫑쫑 뒤따라 가면 반드시 목적지가 나오는 마법(?). 생장피에드포르 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열차에서 내려 인증샷도 찍고 한껏 기분을 낸 뒤 무리가 빠르게 사라져 버리기 전에 서둘러 역사를 빠져나왔다. 편안한 차림에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배낭을 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분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역시 감은 틀리지 않았다.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크레덴셜을 발급받는 거다. '알베르게'라고 하는 순례자를 위한 저렴한 숙소에 묵고 순례자 인증서를 발급받으려면 통상 크레덴셜이라 부르는 순례자 여권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쎄요'라는 스탬프를 받으면 순례 중임을 증명할 수 있다. 보통은 알베르게에서 찍어주지만 바bar나 카페 등에서 찍어주기도 해 도장을 모으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크레덴셜을 발급받으려 테이블에 앉으니 백발의 호호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여기서 일하는 분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로 최소 한 번 이상 순례길을 완주한 선배님이시다. 우리는 겉감 애송이 안감 애송이라고 쓰여있는 택을 안 뗀 줄도 모르는, 뭔가 다 새것처럼 보이는 촌티를 감추지 못한 채 마주 앉았다.


전체 코스와 다음 거점까지의 지도를 설명해 주시고는 첫 번째 쎄요를 찍어줄 테니 기념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하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며 마르고 닳도록 해온 일일 텐데도 상기된 애송이들 눈높이에 맞춰주는 프로페셔널함이 참 따뜻했다. 할머니가 살아온 삶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기 나라, 자신이 믿는 종교의 유산을 소개하는 얼굴에는 편안함과 행복함이 깃들어 있었다. 덕분에 이제 진짜 첫 발을 떼려는 내게도 벌써 평안과 행복이 한 줌 스며들었다.


사무소를 나선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린다. 생장에서 하루 묵으며 설레는 전야를 보내고 다음날 약 26km를 걸어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사람. 바로 걷기 시작해 피레네산맥 중턱에 있는 오리손 산장에 머무는 사람.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마을 외곽에 있는 까르푸에서 간단한 비상식량을 구매하고 다시 사무소 앞 상점에서 스틱까지 구매하고 나니-의외로 생장의 까르푸엔 마땅한 게 없고 바로 옆 아웃도어 상점은 비쌌다- 최최최종, 진짜로 준비가 끝이 났다. 이제부턴 실전이다.



인스타에서 유럽 감성, 유럽 필터라는 사진을 보면 너무 인위적으로 수정했다고 괜히 삐죽거리곤 했었는데, 세상에. 노트르담 게이트를 통과해 니브강이 드러나자 신기하게도 하늘도 강도 나무도 건물도 인스타에서 봤던 그 색감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예전에 유럽에 왔을 땐 주로 바다를 끼거나 아예 완전 도시로만 다녀서 그랬을까. 산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유럽 감성, 유럽 필터는 아닐진대, 처음 보는 화사함이고 놀랍도록 선명한 파스텔 세상이었다. 진짜를 만난 기분. 그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만했던 과거를 반성하는데 왠지 모를 짜릿함이 느껴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7.7km 떨어져 있는 피레네산맥 중턱의 오리손 산장이다. 첫 구간에 피레네산맥을 넘어야 하다 보니 오리손에서 묵지 않으면 17.5km를 내처 걸어야 나오는 다음 마을, 론세스바예스까지 가야 한다. 오리손 산장은 산 중턱에 있는 대피소인지라 물을 마음껏 쓸 수 없다. 식당도 산장에서 운영하는 것 하나뿐이라 모든 사람이 함께 밥을 먹으며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전통이 있다. 산중이든 섬이든 외딴곳이 대개 그러하듯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인데, 음식도 맛이 별로라는 소문이 나있었다.


명색이 프랑스길 이거늘. 오리손에서 묵지 않으면 바로 그날로 스페인에 들어서버린다. 어영부영 숨만 쉬다 프랑스를 지나칠 순 없잖나. 이렇게 끊어 가지 않으면 해발고도 250m에서 시작해 하루 안에 1,450m를 찍고 또 내려와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됐다. 첫날부터 1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소백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셈이다. 수용인원도 아주 많지 않은 터라 일찍이 예약을 하게 됐던 것이다.



몇 걸음 가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또 몇 걸음 가다 360도로 돌아본다. 넋을 놓고 감탄만 하기에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었지만 이런저런 벅찬 감정이 잡아끌어주어 살짝 취한 듯한 기분으로 올랐던 것 같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버킷리스트도 아니었고, 치밀하게 계획한 동반 퇴사와 여행도 아니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도 안 했던 일인데, 지금은 이 길 위를 걷고 있다. 드넓은 들과 산으로 방목 중인 양과 소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는다. 풀밭을 벗어난 자유분방한 심성의 소가 홀로 산책을 다니는 길. 그 길을 나도, 또 그도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벅찬 기분이 드는 거였다.


조금씩 가빠 오는 숨을 중간중간 정돈하며 걷는데, 한참은 더 가야 할 거라 생각했던 오리손 산장이 생각보다 빨리 등장했다. 유튜브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빨간 파라솔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도착했다는 반가움도 잠시, 왠지 모를 애틋함이 발목을 잡아 끌었다. 눈 앞의 풍경을, 지금의 기쁨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그려내기라고 해야 하는 사람처럼 오래 기억하기 위해 부러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다가섰다.


여전히 애송이지만 그래도 땀 흘려 한 구간을 클리어 한 우리는 크레덴셜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서먹함은 잊은 채 당당하게 내밀고 쎄요를 찍었다. 배정받은 숙소에 짐을 풀고, 코인으로 샤워를 하고, 찬물만 나오는 수돗가에서 땀에 젖은 옷들을 빨아 널면 오늘의 미션은 끝이다.



샤워 시간 5분은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그동안 매일 같이 물과 가스와 시간을 사치하며 살아왔었나 보다. 아마 집에 가면 다시 계속 사치하겠지만, 5분도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좋은 팁이 됐다. 늦잠을 자거나 긴급한 상황일 때 몸단장은 5분이면 충분하다는 걸 알면 안심이 될 테니까. (이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심심찮게 벌어지기에...)


저녁 시간에 할 자기소개는 스페인어로 준비했다. 산티아고 길엔 스페인 사람이 제일 많고 그다음 한국인이 많다고 들어서다.-실상은 한국 여행사에서 패키지 상품을 많이 파는 특정 시기에 한정해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웬걸. 그곳엔 이탈리아 사람이 제일 많고 그다음 프랑스인. 스페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스길을 걸어도 스페인 지역인 팜플로나쯤부터 시작한다는 건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결국 난 모두가 영어로 얘기하는 자리에서, 스페인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에서, 한국어도 아닌 스페인어로 나 홀로 더듬더듬 떠들다 앉아야 했다. 영국인 가족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잼버리 뉴스로(...) 알게 된 한국의 폭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문대로 맛있진 않은 음식을 먹어야 했지만 그런 것쯤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풍경, 해는 뜨겁지만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보다 더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다 똑같이 상기된 얼굴을 한 각국의 순례자들과의 저녁 식사. 명쾌하게 클리어 한 오늘의 미션. 단순한 행복의 시작으로 더없이 완벽했으니까.



Tip. 오리손 산장에서 묵는 것을 추천합니다.

풍경이 정말 끝내줍니다. 전체 구간 중 피레네산맥을 넘는 첫 하루 이틀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초반이니만큼 체력적으로도 이 구간을 서둘러 빠져 나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시 같은 길을 걷는다면 다음 장소에서 숙박하는 일정으로 갈 것입니다. (예상 총 소요 32일) 
- 1일차 오리손
- 2일차 론세스
- 3일차 수비리
- 4일차 팜플로나
- 오리손 예약은 refuge.orisson@wanadoo.fr 여기로 이메일을 직접 보내거나
https://www.refuge-orisson.com/en 홈페이지의 [contact & access] 메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ㄴ 해당 페이지에 가면 이름, 이메일주소, 내용을 적으라는 박스가 3칸 나옵니다. 결국 홈페이지에서 이메일을 작성하는 개념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10월 15일부터 3월까지 동계 기간에는 운영하지 않습니다.


짧은 동영상으로 1일차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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