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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슬머리 Sep 06. 2024

3. 사랑을, 주세요.. (1)

*

“100까지 세는 거야, 셀 수 있지?”


눈빛을 반짝이며 웃음이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있는, 모여 있는 아이들 중 제일 어린 진수는 동네 형들과 누나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늘 형들과 누나들의 숨바꼭질에 끼고 싶었는데 작다는 이유로 제외되어 왔었다. 처음에는 10까지 셀 수 없었기에 제외되었고, 열심히 외워오자 20으로 올렸고.. 그게 100이 되자 진수는 생각보다 빨리 100까지 터득해 냈다.


자신들도 100이 제일 큰 수였기에, 더 이상의 이유를 찾지 못한 동네 형들과 누나들은 어쩔 수 없이 진수를 술래로 만들어 포기하게 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진수가 제풀에 나가떨어져야 귀찮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 이, 삼, 사..”


진수는 또박또박 느린 속도로 숫자를 외치고 있었고, 동네 형들과 누나들은 최고 난도의 장소를 찾느라 서둘렀다.


승호는 진수가 쉽게 접근하지 못할 장소를 찾다가 골목 제일 안쪽 영희네 집 대문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진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였고, 영희네 집 연탄 보관하는 곳이 많이 컸기에 그 장소를 선택했다. 진수는 아직 그 장소를 힘들어할게 분명했다.


컴컴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은 승호는 아무도 자신을 발견 못할 거라는 확신에 얼른 ‘못 찾겠다’는 진수의 목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며 속으로 진수랑 같이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온 대화내용.


“승진이 엄마도 부르지.”


“몰라, 그냥 새초롬하게 있는 게 별로야. 우리랑 말 섞는걸 별로 안 좋아하던데.”


동네 아줌마들이 영희네 대문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승호 엄마면 승호 엄마지, 왜 승진이 엄마예요? 첫째 아들 이름 붙이는 거 아닌가?”


얼마 전에 이사 온 경민이 엄마는 자신의 말에 서로 눈짓하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경민이는 모르겠다. 승진이 엄마 두 번째야. 승호 엄마는 아니지.”


“진짜? 아.. 그래서 승호랑 엄마가 어색했구나.”


“그게 느껴졌어? 승호 걔만 보면 짠하지.”


“그럼, 승호 엄마는요?”


“몰라. 다들 제대로 사연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잘 알던 반찬가게 할머니도 시골로 가셨으니..”


승호는 진수의 숫자가 끝났다는 사실을 잊은 채, 들려오는 대화에 손가락으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승진이 엄마’


승호는 자신의 친엄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승진이 엄마가 자신의 새엄마라는 사실도 사람들이 하는 말로 알게 된 거였다.


그렇다고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은연중에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새엄마가 하는 차별을 승호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가끔 술에 취한 동네 아저씨들이 계모가 안 때리냐고 지나가는 승호에게 짓궂게 웃으며 묻곤 했었다. 승호는 그 말에 당연히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승진이 엄마는 계모고 자신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혼자서 천천히 담아두고 있었다. 한 번도, 조금도 때린 적 없었다. 말 안 듣는 승진이의 엉덩이를 몇 번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앉아 있던 승호는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집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조용히 대문 밖으로 향하던 승호는 담벼락에 기대앉아 있는 진수를 발견하고는 숨바꼭질 중이었음을 기억했다.


“진수야, 다 찾았어?”


진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실망한 표정에서 웃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승호형, 찾았다.”


한참을 다시 찾던 진수는 아무도 찾지 못했고, 결국에는 ‘못 찾겠다’는 말을 해야 했다.


골목 곳곳에서 의기양양하게 나오던 동네 아이들은 왜 잡혔냐며 승호를 흘겨보았다. 승호는 멍하게 있다가 웃고 말았고, 다음 게임을 원하는 진수의 말에 벽 쪽으로 가서 팔을 올려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100까지 세기 시작했다.


동네 엄마들의 자신의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승호는 바라보고 있었다.


 ‘승호야, 밥 먹으러 들어와.’라는 말을 지금껏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승호는 설명하지 못할 마음을 바닥에 있던 돌을 조금씩 발로 차는 것으로 대신하며 집으로 향했다.


“형, 손 씻고 오래”


“어.”


승호는 까매진 손을 씻다가 좀 전에 들었던 말들이 떠올라 손을 더 빡빡 씻어냈다.


**

아이들이 놀자고 부르러 왔지만, 승호는 일이 있다는 말을 하며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승호는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확신할 수 없지만,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방 옷장을 열어보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았다. 옷만 넣을 것 같았지만, 열고 닫을 때 별생각 없이 봤던 옷장 안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것들이 있는 것 같았다. 보자기로 묶어둔, 뭔지 모를 그런 것들이 아마 지금 승호가 열어봐야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맨 위 보자기에 묶여 있던 지난번 아버지가 보여준 족보를 치워냈다. 그 밑에 있던 상자를 묶어놓은 보자기를 풀어보았고, 알지 못하는 서류였기에 조심스럽게 넘기며 무엇을 찾아야 되는지도 모를 것을 찾고 있었다.


편지봉투도 몇 통 보였다. 그래서 확신했다. 보낸 이와 받는 이가 달라질 뿐, 늘 같은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들이었기에 승호는 그중 하나를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상자를 보자기로 묶었다.


편지 봉투 안에는 서류 한 장, 편지지 한 장이 있었고, 서류는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편지도 한자가 군데군데 적혀있고, 흘려 쓴 글씨라 읽을 시도도 하지 못했다.


주소는 그래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승호는 뭔가를 또 해봐야 되는 용기를 내고 있었다.


동네 슈퍼로 향한 승호는 사탕을 구경했다. 슈퍼 아줌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손님이 있었기에 우선 뒤쪽에서 물건을 보고 있었다. 손님이 나가고 승호는 아무 사탕이나 하나 들고 좀 전에 외웠던 주소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슈퍼 아줌마에게 갔다.


“아줌마, 미조동이 어디예요?”


처음 말해보는 주소를 잊을 까봐 돈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아줌마에게 질문을 먼저 했다.


“어.. 여기서 버스 타면 세 정거장 정도? 왜?”


승호는 버스 세 정거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지만, 우선은 희망이 생겼다.


“아,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요.”


자연스럽게 슈퍼를 나온 승호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뭔지 모르지만 시도해야 된다는 마음의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버스 정류장에 섰지만, 어느 방향인지도 몰랐고 여기가 맞는지도 몰랐다.


어쩔 줄 몰라하며 정류장에 서는 버스만 보고 있었다. 승호가 줄줄이 서는 버스를 바라보며 두리번거리고 어슬렁거리자, 버스 기사 아저씨가 자리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며 물었다.


“너는 어디 가는 버스 기다리냐?”


“아, 미조동 가려고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승호는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이 버스는 안 가는데, 11번 타면 이쪽 방향으로 쭉 갈 거야.”


“네. 고맙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정보를 얻게 된 승호는 버스 기사 아저씨가 가리킨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오늘은 분명 뭐든지 될 것 같은 날이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던, 얻던 승호는 길 가던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 용기까지 갖게 되었다.


물어물어 결국 어느 동네에 들어선 승호였다. 동네 입구에 있는 슈퍼 앞 평상에 살짝 걸쳐 앉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리가 욱신거렸다.


“얘야, 어느 집 애니? 처음 보는데.”


물건을 들여놓던 슈퍼집 아저씨는 평상에 앉아 있던 승호를 보고 말을 걸었다. 또 용기가 필요했다. 편지봉투에 적힌 한글을 찾아 읽었다. ‘김철현 귀하’


“김철현..”


“철현 어르신 집 애야? 처음 보는데? 손자? 이름이 뭐야?”


“이승호입니다.”


“아, 혹시.. 영주 아들이니?”


영주.. 아마 그럴 것 같았다.


“아이고, 많이 컸네. 엄마 얼굴이 보이네. 아이고..”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맞는 것 같았다.


“잠깐만 있어봐.”


슈퍼 안으로 들어간 아저씨는 잠시 뒤 아줌마랑 같이 나왔다.


“할아버지 만나러 왔어?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시골 다니러 가셨는데.. 길이 어긋났네. 어쩌냐.”


승호의 모든 용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고, 영주랑 똑같네.”


승호는 자신을 보며 연신 ‘똑같다’고 말하는 아저씨, 아줌마의 말에 어쩔 줄 몰라 땅만 바라보았다.


“영주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승호는 이번에도 느꼈다. ‘영주는 없다.’


승호는 어떻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고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나온 것 같았다.


어디를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게 다시 걷고 있던 승호였다. 분명 좀 전에 찾아올 때는 돌아갈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기억하며 걸어왔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걸 놓치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 곳에 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없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나무는 눈을 떴다. 알지 못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었고, 사방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나무는 지금의 자신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무는 길에 세워진 자동차의 창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살짝 쌀쌀해지는 게 느껴지자 외투도 입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신발도 짝이 맞지 않게 신고 있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어쩌면 이상한 여자 일지도 몰랐다. 만약 이 사람이 조만간 49:51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설득하고 막아야 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무는 인기척에 돌아보았다. 작은 남자아이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자신의 옆에 있었다. 그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안 좋아 나무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말 안 하고 혼자 이렇게 멀리 오면 안 돼. 알았지?”


‘아는 아이였네.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슬프지?’


나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렇게 모든 걸 알았던 것처럼 말이 나오고 있었다.


“네, 잘못했어요.”


나무는 이 아이가 너무 안쓰러워 아이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무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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