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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이 뜨기 전에 Mar 13. 2023

파란, 기억여행자 3.

9시 22분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은 낯선 손님이 왔다 간 것처럼, 모든 것들이 헤집어져 있었다. 서랍마다 삐죽 나와 있는 옷들이 날름날름 혀처럼 꿈들 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 숨이 푹 나왔다. 조금 전에 내가 해 놓고 간일이었다. 어제 일이 생각나지 않아 이리저리 뒤적였던 나의 흔적들이었다. 어제 일도, 그제 일도, 생각해 보면 그전 일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 생각날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기억이 너무 막연했다. 그저 회사를 갔겠지, 정도. 

그 외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침대에 누웠다. 마음은 빨리 이 난장판을 정리해 놓고 싶은데, 몸은 엿가락처럼 벌써 늘어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경우에 딱 어울리는 말이겠지만, 아까부터 몸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나게 했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푹 잠을 자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잠이 든 나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오후 9시였다.     


아홉 시... 아홉 시!!     


나는 알아차렸다. 오후 아홉 시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왜 아홉 시에 맞춰놓았을까?     


준비하고 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허둥지둥 그 식당으로 달려갔다.     


9시 22분.     


어서 오세요!     


식당 주인아주머니께서 나를 반기셨다.      


아구... 늦지 말고 오라 했는데... 어서 들어와요.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식당 안에 들어섰는데, 아까 보았던 장식장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둘러보는데,      


청년, 저녁은 먹었어요?       


아.. 아니요...     


그러고 보니, 아까 아침을 먹은 것이 전부였다. 점심도 안 먹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잠만 잤던 것이다. 또 한 번 허기가 밀려온다.      


저리 안쪽으로 가 앉아요. 나도 이제 저녁을 먹어야 하니 같이 먹어요. 내가 대접하는 거니까 부담 없이 들어요.     

아주머니는 식당 문을 닫고 앞 쪽의 조명 불을 끄셨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팔팔 끊는 설렁탕 두 그릇과 몇 가지 반찬을 챙겨 오셨다.       


아까도 먹었는데, 같은 메뉴가 되겠네? 괜찮지? 우리 식당에는 이거 하나밖에 없어. 나는 매번 먹어도 안 질리는데...     


아, 네. 괜찮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설렁탕은 똑같은 메뉴였지만, 아까는 없었던 반찬들, 신선한 샐러드, 당근이 들어간 계란말이, 달큼한 무 조림, 짭조름한 장조림이 손을 정신없게 했다.  식당에 자주 와서 주인아주머니가 낯설지는 않지만, 이렇게 식사를 같이 한 적은 처음이다. 이렇게 난데없는 식사 자리에 눈치 없이 나는 허겁지겁 반찬들을 비워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아이고,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 천천히 먹어요.     


금 새 비워진 반찬 그릇에 다시 반찬을 담아주며, 주인아주머니는 웃으셨다.     


뭐 그리 바쁘게 살아요? 자기 몸도 잘 못 챙기고, 그러면 몸이 화를 내지. 화만 내는 정도면 또 그나마 다행이지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거예요.       


나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었다. 멀뚱한 마음에 식당 안을 둘러보다가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장식장이 보였다.     

어? 아까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아서 이상했는데? 원래 있었던 거 맞죠?     


하하. 청년! 너무 이상하게는 듣지 마세요. 저 장식장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거든요.     


네, 뭐라고요?     


나는 한껏 먹은 밥이 턱 막히는 듯했다. 물 한 잔을 급하게 들이켰다.     


아이고, 밥 먹고 나서 체하겠네요. 그리 놀랄 것은 없어요. 난 사실 아까 청년이 저 장식장의 모자를 만지려 했을 때가 더 놀랐어요.


아. 죄송해요.      


아니, 저 장식장을 본 사람이 당신이 처음이어서 놀란 거였어요.     


그럼 저 장식장을 본 사람이 저 밖에 없나요?     


그건 아니고요. 오늘 당신 이후로 몇몇 사람이 더 보았지요. 그분들은 벌써 이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아까 떠났어요.     


떠나다니요? 어디로요?     


각자 자신들의 기억 속으로요!     


네?     


이 설렁탕 한 그릇 먹고 나면, 기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에 저 모자들의 장식장이 보이지요. 기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기억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저 모자를 쓰면 기억 여행을 할 수 있거든요.      


기억 여행이요?     


나는 다시 한번 물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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