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장터

by 바람

버스가 다니는 길에서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에 유명 마트가 자리하고 있다. 오가는 길에 거의 매일 들르는 곳이다. 물건을 사면 계산대마다에 열명 이상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곳. 오전 시간은 물론이고 저녁시간까지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저녁 끼니를 준비하라고 사람을 붙잡는 곳.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마도 전국 매출 순위에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거라고 혼자서만 손꼽는 매장이다.


매장을 나와 길을 건너면 화단이 잘 조성된 길이 나온다. 다른 동네까지 세세하게 관찰하지는 않았지만 20년 이상을 살며 동네 구석구석을 나름 많이 살핀 사람의 경험으로는 사람들의 드나듦이 인근의 어느 아파트 단지보다도 가장 많은 곳이 아닐까 싶다.


유동인구가 많으니 마트 하나로 만족할 수 없다. 당연히 노점상들도 많다. 옥수수와 술빵을 파는 트럭은 매장 앞에 고정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횡단보도를 둘러싸고 상하좌우로 뻥튀기 과자를 파는 트럭, 과일 파는 트럭, 닭과 돼지 바비큐를 파는 트럭이 놓여 있는 풍경이 올해 초의 모습이었다.


3월이 지나며 타코야끼 트럭, 오징어 튀김을 파는 푸드트럭과 양말, 가방과 옷을 파는 노점상에 밑반찬을 여러 종류 만들어 파는 상인까지 오전 오후를 번갈아가며 네 귀퉁이와 마을 입구까지 들어와 자리하고 있다. 삶이 팍팍한 시대의 모습이 이곳에서 재현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어느 순간 노점상이 많아진 것을 느낀다. 지나는 사람들은 여느 상가를 찾듯 노점상들을 찾는다.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던 상인들이 없으면 옆 상인에게 묻는 사람도 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미 많이 알려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중 몇 곳은 우리 가족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노점상들을 지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길가에는 시에서 설치한 의자가 줄지어 드문드문 놓여 있다. 의자는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다. 날씨가 온화한 날, 아침이 되면 할머니들이 하나 둘 천천히 나와 어느 날은 아파트 입구, 어느 날은 공원 앞, 어느 날은 학교 후문 의자에 자리를 차지하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할머니들이 자리한 곳에는 또 다른 노점상이 자리를 잡는다. 매일 도라지나 감자 호박 고추 등 제철 채소를 조금씩 팔러 나오는 할머니와 아이들의 하굣길을 맞이하는 어린이용 학습지,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각각 손님을 맞는다. 그 옆에는 시골의 지인에게서 포도나 감 등의 특산물을 가져와 파는 상인 혹은 주민들도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아파트 단지를 끼고 길게 형성된 재래시장 같다.


시에서 마련한 동네 한 바퀴 6km 코스를 몇 번 걸어본 적이 있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도는 코스였는데, 그 어느 곳을 걸어도 이곳만큼 사람 사는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람 사는 향기의 필수 조건은 역시 사람이다.


상인들의 외침이나 흥정 소리를 듣는 것도, 때로는 할머니들의 노랫가락도 들리는 이 길은 시골의 작은 장터를 옮겨 놓은 것 같다.


고요한 길, 잘 정돈된 길가에 여기저기 자리한 노점상은 조용한 사색의 분위기를 방해하는 느낌도 있다. 노점상 주위로 손님이 둘셋 몰려들 때면 지나는 사람들의 보행이 어렵기도 하고, 어쩌다 자전거라도 지나가면 그야말로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부딪침이 염려되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서로의 지혜를 필요하다. 상인들은 보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나란히 놓인 의자 옆이나 움푹 들어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지날 때마다 맛보고 가라고 말을 건네거나 가격을 외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천천히 구경하는 것을 무리하게 방해하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해 제한된 생활이 10개월째. 매달의 풍경이 다르고 거리의 모습도 달랐지만, 상가를 막 벗어난 아파트 사이의 이 길은, 아이들과 학생들, 젊은 부부와 중년, 그리고 노년과 상인이 따로 또 같이 공존하는 다채로운 삶의 현장이다. 이름은 여전히 신도시 아파트지만, 시골 동네 같은 정취를 풍긴다.


가끔 사는 곳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처럼 크게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나는 이곳이 좋다. 처음엔 주변의 시설만으로 이곳만큼 완벽하게 갖춰진 곳이 없다고 말했었다. 공원이며 종합병원에 학교와 백화점, 대형 쇼핑몰이 근처에 여럿 있고 영화관과 맛집도 많은 곳이었으니. 지금은 다른 이유로 완벽하게 갖춰진 곳이라고 말한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느껴지는 곳.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은 뒤틀리고 냉소적이며 신경질적이다. 그가 변해가는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영화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은 까칠한 나도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복잡하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중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시간이, 나이가, 어쩌면 이 시대가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사 오기 전에도 지어진지 이미 20년 가까이 된 아파트였던 이곳에는 지금은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다. 봄이면 깨끗하게 단장된 화단의 흙더미에서 싹이 올라온다. 여름이 되면 하루가 다르게 진한 푸른빛을 성성하게 뿜어 냈고 가을이면 매일 다른 빛깔의 옷을 갈아입었다. 그 모든 풍경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


초겨울이다. 해가 내리쬘 때에는 마을은 여전히 수런거린다.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학원과 학교를 오가는 중고등 학생들의 등하굣길, 출퇴근길의 왁자한 소리가 사라지면 찬 바람이 길을 휘젓는다. 지금은 노점상들은 길게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봄이 오면, 그 모두가 어우러진 왁자한 목소리가 다시 이 길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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