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넓은 광화문 거리에서 탱크를 본 적이 있다. 괴괴한 도심,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들고 거리 곳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 교복을 입고 등하교하던 길의 풍경이었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친구들과 얘기하는 목소리도 조심스러웠던 기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상황을 영화화한 스크린을 마주 하고서 당시의 경험은 공포로 다가왔다.
10.26 사태 이후, 국장이 치러지는 광화문 네거리의 풍경도 기억에 있다. 모여든 인파 중에는 훌쩍이며 엎드려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죽은 이가 생전에 자행한 온갖 범죄와 몰상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라님의 죽음이라고 슬퍼했다. 조선시대의 백성이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그 생경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누구도 잘 죽었다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2004)>와 <변호인(2013)>, <1987(2017)>을 거쳐 <남산의 부장들(2019)>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았고, 그때마다 나는 종로나 광화문 네거리로 소환되곤 했다. 독한 최류가스 냄새가 버스의 작은 틈을 뚫고 들어왔고 사람들은 입과 코를 막았다. 버스를 갈아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을 때면 혹시라도 이유불문 검문에 잡혀갈까 두려움에 떨던 시절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2023년 겨울,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영화로 만났다.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이 발생한 수도 서울 한복판의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뀐 그 밤의 이야기가 2시간 30분 동안 스크린에 펼쳐졌다. 결과는 익히 아는 결말이지만 군사 반란의 주역이었던 인물들의 면면과 그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일당들의 일방적인 쿠데타 성공으로 기억하고 있던 내게는, 반란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의 9시간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더구나 반란군에 맞서는 진압군의 치열한 대응까지는 더더욱 몰랐던 일이었고. 그만큼 철저하게 역사에는 가려져 있던 이야기들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며 2023년의 현실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선은 '하나회'로 알려진 군부 내 사조직, 이익을 같이하는 자들의 모임은 지금의 검찰 조직을 보는 듯했다. 쿠데타가 성공하고 하나회는 전공이나 전문적 지식과 상관없이 국정의 요직을 촘촘하게 차지했다. 그들만의 세상에 국가와 국민은 없었다. 국가와 국민의 안녕은 없었고 조직과 일신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욕망의 시간이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안 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을 리드해 주길 바란다니까.
여기 떡고물이 떨어지길 바라는 그들 아가리에 왕창 떡고물을 처넣어줄 거야.
영화에서는 강력하게 상황을 통제하는 1인, 전두광(황정민)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그가 흔들리면 조직이 흔들리고 조직이 흔들리면 모두가 궤멸하는 상황. 실패의 두려움에 대한 불안 심리를 파고들어 사람들을 설득하고 어떠한 불법도 합법으로 조작하고 가담하게 하는 전두광의 모습에서 지금의 누군가가 보이기도 했다. 합법이 안 되면 불법으로라도, 그도 안 되면 협박과 회유로 사람들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1인과 그를 위한 조직.
다음으로 법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그들은 법을 조롱한다. 총으로 위협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통신망을 감청해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제한다. 지금은 어떤가. 현 정권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시행령을 통한 정치와 비슷하다. 국회를 통과한 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시행령 통치는 입법권의 근간을 흔든다. 시행령은 법의 범위를 넘어서며 결국 부정부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서울의 봄>은 2023년 12월 6일 자 누적관객 52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람들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20대와 30대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당시의 일을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또한 더 알아보려고 공부해야겠다는 말도 한다고 한다.
패배한 민주주의의 역사, 한국 근현대사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거대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내가 경험한 제5공화국의 이야기도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음습하고 두렵고 무서운 소문과 함께 잠시 전시되고 흩어지는 사진으로, 혹은 만화로, 라디오 드라마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일당들이 법적으로 처벌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입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렸으며 영화로 조금씩 접할 수 있었다.
역사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2010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 민주주의 연구소가 편찬한 <한국민주화운동사 3: 서울의 봄부터 문민정부 수립까지>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보를 준다.
결말을 아는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많은 관객들이 답답함을 누르면서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인간의 탐욕과 인간됨의 도리가 사라지는 그 어이없는 상황과, 어이없는 방식으로 국가가 무너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들은 국가를 탈취하는 대도를 표방한다. 그들은 쿠데타가 아닌 혁명을 만들자고 말한다. 너무도 당당해서 보통의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배우의 연기지만, 쿠데타에 성공하고 마지막에 화장실에서 전두광이 미친 듯이 크게 웃는 장면에서는 한 인간의 권력을 향한 집념의 광기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느낌마저 든다.
대한민국 육군은 다 같은 편입니다.
전두광의 같은 편이 되자는 이야기에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이 한 말이다. 모든 군인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두광은 자신을 위해 싸웠다. '하나회'로 특정되는 권력 집단에 맞서 그들을 저지하려 했던 이태신 등은 전두광의 의도를 파악했고 최선을 다해 대응했으나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쿠데타 세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인생 마지막 또한 처참했다. 마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문득, 지금의 검찰은 어떤가 생각한다. '검사동일체'를 부르짖는 대한민국 검찰은 모두 그들끼리 편을 먹은 건 아닐까? 아니라고 믿고 싶다. 강력하고 무도한 누군가의 리드에 휘말리지 않는 깨끗한 검찰. 지저분하고 탈법적인 결속이 아닌 법치 정의를 구현하는 검찰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다.
쥴퓌 리바넬리가 쓴 <마지막 섬>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이 나온다. 장기 집권 후 마지막 노후를 보내기 위해 섬에 정착한 그는 자기의 방식으로 섬을 통제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소설은 독재자의 권위주의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딘가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조금씩의 책임이 있다."라고.
“악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그에 맞서 대항하지 않는 모두는 그 악행에 일정 부분 동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서서히’ 독재자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에게 처음부터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저항하는 것은 고귀한 것입니다."(쥴퓌 리바넬리, <마지막 섬> 중)
다시 50년 후 영화의 주역은 누가 될까? 그게 그들만의 리그로 답답함을 주는 것이 아닌 관객을 통쾌하게 하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