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의 불순물과 스타트업의 ‘화이트박스’전략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지킬이 비극을 맞이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악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시료에 섞여 있던 '알 수 없는 불순물' 때문이었죠. 처음에 우연히 성공했던 변신 약이 다시는 재현되지 않았던 그 비재현성의 공포는, 화학자들에게는 소설보다 더한 현실적인 서늘함으로 다가옵니다.
최근 스타트업 CTO로 합류하여 디스플레이 소재 개발을 진행하며, 저는 소설 속 지킬 박사가 마주했던 그 '불순물의 안개'와 마주했습니다.
블랙박스의 위험성
대기업 연구소 시절, 우리는 종종 기밀이라는 이름 아래 성분이 가려진 시료들을 다루곤 합니다. Ambient variables를 조절하며 함수를 추정하는 방식의 공정 최적화는 효율적일지 모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화학적 직관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스타트업의 현실은 한술 더 뜹니다. 제대로 된 라벨링도, 제조 이력도 없는 시약병들. 15%라고 믿었던 농도가 사실은 10%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분자량이나 용융지수조차 모르는 고분자 시료를 마주하는 것은 연구자에게 '블랙박스' 안에서 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데이터의 기원이 불분명할 때, 우리가 세우는 모든 가설은 사상누각이 됩니다.
날실과 씨실: 분석적 통찰로 쌓는 논리
제가 선택한 해결책은 '제로베이스(Zero-base)'였습니다. 불확실한 기존의 레시피를 수정하는 대신, 모든 변수를 새롭게 정의하고 독립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화학은 재료 합성만으로 결론지어지지 않습니다.
화학적 구조: boiling point, molecular weight, wetting, chemical reaction, functional group, ...
광학적 특성: absorption, reflection, emission, scattering, ...
물리/전자기적 특성: conductivity, mobility, capacity, ...
이처럼 서로 다른 분야의 독립적인 분석 결과들이 마치 날실과 씨실처럼 정교하게 엮여 하나의 지점에서 만날 때, 과학적 가설은 비로소 단단한 '사실'이 됩니다. 두 세 개의 서로 다른 관점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할 때 느껴지는 그 쾌감은, 불확실한 블랙박스를 투명한 화이트박스로 바꾸어 놓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스타트업 CTO의 사명: 시스템화된 직관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우리는 고유의 기술을 확보했고 특허 출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이 준 가장 큰 자산은 단순한 레시피가 아닙니다.
스타트업에서 CTO의 역할은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감'이나 '운 좋게 섞인 불순물'에 의존하는 연구 문화를, 데이터와 논리가 지배하는 '재현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라벨이 없는 시약병에 이름을 붙이고, 공정의 모든 스펙을 수치화하는 것은 지루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초적인 '화이트박스' 전략만이 지킬 박사가 겪었던 비재현성의 비극을 막고,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가치로 전환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제 막 첫 번째 실타래를 엮었습니다. 이 정교한 논리의 비단이 어떤 혁신적인 디스플레이 제품으로 완성될지, 그 과정을 계속해서 공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