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인설 PART Ⅱ-6 : 시간보다 기회를 우선하는 사고방식
베트남에서 생활하다 보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게 된다. 베트남 사람들이,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분명한데도 갑자기 다른 일을 선택하는 것을 보는 순간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이미 진행 중인 일이 있음에도 더 유리한 제안이 들어오면, 그 일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일을 먼저 처리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한국인의 기준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약속한 일이 있는데 왜 바꾸지?’
‘지금 하고 있는 걸 먼저 끝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이 선택이 그리 낯설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자연스러운 판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차이는 개인의 단순한 성격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양국의 시민들은 시간과 선택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지금’이 기준이다. 지금의 일정, 지금의 약속, 지금 하고 있는 일. 이것을 지키는 것이 신뢰이자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시작한 일은 끝까지 마무리한다' 이 원칙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조금 다른 기준이 작동한다. 베트남에서는 ‘지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회’다. 상황이 바뀌고 더 나은 선택지가 생기면, 기존의 흐름을 유지하기보다 그 기회를 먼저 잡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 된다.
그래서 이런 장면이 반복된다. 진행 중인 일보다 더 좋은 조건이 생기면 이동하고, 이미 잡힌 일정이 있어도 상황에 따라 바뀐다. 이 방식은 업무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더 좋은 조건이 나타나면 현재의 자리를 지키기보다 그 기회를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직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가능하면 오래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상황이 바뀌면 선택도 바뀌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한국인은 이렇게 느낀다.
‘왜 이렇게 자주 옮기지?’
‘경력이라고 볼 수도 없는 기간을 자랑이라고 이력서에 써넣은거야?'
반면 베트남인은 이렇게 생각한다.
‘더 좋은 조건인데 왜 안 가지?’
‘굳이 지금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나?’
베트남에서는 이런 선택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기준이 항상 효율적이거나, 신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업무에서는 일정이 흔들리고, 예측이 어려워지고, 책임의 경계가 흐려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이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현장에서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노동력에 의존하는 제조업을 운영하는 관리자들에게 노동자들의 이직 및 채용문제는 가장 큰 골치거리중의 하나이다. 인근 공장의 임금이 몇 만원만 높게 제시되면, 주저없이 이동하는 사례는 낯선 것이 아니다.
관리직으로 근무하며 직원 채용 면접을 할 때의 경험이다. 이력서 안에 이전 회사의 업무이력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A사 근무 6개월, B사 근무 1년, C사 근무 3개월... "이직을 많이 하셨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담담했다. "여러 회사에서 경력을 쌓아보고 싶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다고 생각하면 이동했습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몇 개월 정도 근무하면 다 배웠다고 생각하시겠습니?"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 듣고 싶은 강의를 골라 듣듯 직장을 옮기는 것인가?’
그런데 이 모습은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 기준의 차이다.
한국은 시간과 약속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베트남은 상황과 기회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인은 계속 불안해하고, 베트남인은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베트남에서 중요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이 현상을 무조건 이해하거나, 무조건 맞추려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기준을 세울 것인지 명확히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변경되지 않는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건 꼭 해야 합니다”보다 “이 일정은 변경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앞에서 다룬 이야기들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시간은 흐름이고, 계획은 유동적이며, 우선순위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급함은 공유되지 않으며, 기다림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 '지금보다 기회를 본다.' 이것이 베트남식 시간 감각의 핵심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시리즈의 방향을 조금 더 안쪽으로 옮겨보려 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그 행동을 만들어내는 ‘관계 중심의 구조’를 들여다보려 한다.
왜 베트남에서는 일보다 사람이 먼저가 되는지, 왜 싫어도 직접 거절하지 않는지, 왜 말을 돌려서 하는지, 왜 가까워지면 선이 흐려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이 질문들을 통해 베트남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또 하나의 기준, ‘관계’라는 축을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