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계사회, 베트남 여성의 파워

수평적, 분권적 사회에 기초하여, 여성 자체적으로 성장한 베트남

by 한정호

베트남은 ‘음기의 나라’라는 말을 하곤 한다. 여성의 파워도 세고 지위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베트남롯데리아에서 근무하던 당시, 파트너 중에 마담 Van이란 분이 있었다. 그녀는 베트남의 항미전쟁 당시 스나이퍼로 활약했었다고 한다. 호치민시에 있는 5성급 호텔의 사장이기도 한 그녀는 공산당과의 친분으로 비즈니스에서 컨설턴트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항미전쟁 당시 북베트남(현재 집권 공산당)군의 전사자만 44만 ~ 110만 명, 부상자도 6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활동을 할 사람들이 여성들로 주가 된 상활이었으며, 여성이 베트남 경제적 주체로 우뚝 선 것이다. 기업 오너들 중에는 여성 CEO를 상당수 볼 수 있다. 특히 개발과 관련하여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경우 심심치 않게 여성이 나타나 중재를 하곤 한다. 전쟁 후 공산당을 등에 업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다.

20190609_093622.jpg 베트남 여성 전사. 호치민 미술관 소재

2022년 현재 국회의원 총 인원 496명 중 여성위원은 133명으로 전체의 26.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2016년에는 응웬티킴응언 여성의원이 베트남 최초로 여성 국회의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에서 여성은 남녀평등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주의의 이념과 더불어 항미전쟁중에 발생한 남성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경제주체로서의 전환이 맞물려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며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정에서의 여성의 파워나 지위는 어떨까? 주택구입이나 주요 자산의 관리 그리고 자녀의 양육이나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결정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의 생산활동층은 남녀가 모두 직장생활을 한다. 즉 자산형성에 있어서도 여성이 담당하는 비중이 크다.

유교적 관습에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남존여비 사상은 베트남에선 발견하기 어렵다. 단순 성(性)에 있어서는 남아와 남성을 선호하지만, 그것이 생활에서 반영되어 수직관계를 형성하어 있지 않다. 베트남 특성 중의 하나는 수평적 관계 구조가 여기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유교를 따르는 전통은 같은데 왜 베트남 여성이 한국 여성보다 더 파워풀하고 활동적일까?' '왜 부부사이에서 여성의 파워가 한국보다 더 느껴지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곤 했다.

이런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부부별산제와 남녀균분상속제이다. 부부간의 재산소유권과 관련하여 남편이 아내의 재산을 상속할 권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부부의 재산권에 있어서는 남편 재산이나 부인 재산은 결혼 생활 중에도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고 독립된 채로 존재하였으며 단지 그 관리만 공동으로 하였다. 이렇듯 베트남의 경우는 유교가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재산권을 계속 인정해 주었다는 점이다.

2. 베트남 여성들은 농사일을 하면서 한 축을 담당하였고, 가정경제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한국도 농경사회로 여자가 그만큼의 일을 담당하였지만 한국사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또한 베트남 여성은 농사일에서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가족 내에서 어머니는 가정경제 담당자이며 자녀교육도 담당하였다. 즉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만큼 때로는 아버지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더불어 베트남의 마을 공동체 내에서 사회의 대외적인 활동의 주체였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여성은 주로 가사 일에만 전념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베트남여성은 전통적으로 집안내의 대소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높은 지위의식이 있었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 관계 속에 나타난 한국과 베트남의 고부관계 비교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 호 티 롱안 박사학위 논문 발췌 정리


09화 한국 Vs 베트남 여성지위 비교 (brunch.co.kr)


한 편, 베트남 여성들의 자식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놀라울 정도로 지극하다.

몇 해전 관리자로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한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이혼을 하였다.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의 사랑도 누구 못지않았었는데 이혼을 했다는 말에 매우 놀랐다. 이유는 더욱 놀라웠다. 베트남 와이프는 빨리 자식을 갖기를 원했고 한국 남편은 지금은 젊고 서로 일을 해서 자금을 모아야 하니 출산을 조금 미루자는 것이 이유였다. 얼마 후 여성은 법원에 이혼을 신청했고, 법원은 단 칼에 이혼 사유를 인정하고 이혼을 승인하였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아주 어린 미혼모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아르바이트생 직원이 자기는 집에 자식이 있다는 말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남편과 이별하고 아이는 자기가 키우고 있는데 양육비를 전 남편이 보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도 한다. 자기는 자식만 있으면 된다고. 특히 대도시에서 일을 하는 미혼모들은 아이들을 시골에 사는 부모님들이 키워주는 경우들도 많다고 한다. 자기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보내고 부모님은 자식들을 키워주는 것이다. '어떻게 이혼으로 가정이 파괴되었는데도 자식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할까?'

한국의 우리 딸아이는 지금 결혼을 시기를 고민하고 있지만 아이를 갖는 것은 고민이 많다며 결혼시기도 못 정했다며 손사래를 치며 화제를 바꾼다. 두 사람이 사랑하고 가정을 꾸려 이쁘게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고 자식은 가정을 키우는 선택사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가정의 기준이 자식인 듯하다. 선사시대부터 베트남은 모계사회였고, 여성 나름의 재산과 지위를 일정정도 확보하고 유지하며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나만의 가정을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자체만으로 의무를 다한 것이고, 권리도 갖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기야 한국 속담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다. 남편이야 헤어지면 남이지만 자식은 나의 피를 나눈 것이고, 가정을 무너진 것이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베트남 여성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국가를 유지해 오고 있지 않는가! 현대에도 베트남 여성들은 강인한 생활력으로 당당하게 국가 재건과 발전에 기여하며 살아오고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살림과 육아까지, 자녀교육까지 책임지는 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유지해 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모계사회의 전통과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는 듯하다.


직장에서 상사인 나의 부름이나 지시를 무시하는 듯한 베트남 현지 직원들의 태도에 마음이 상하거나 화가 난 적이 있었다. 특히 근무시간이 끝나고 회식자리에서 맞담배를 피는 아들뻘 직원의 모습에 놀라 현지인들의 생활 방식을 살펴 보기도 하였다. 베트남은 유교가 역사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깊히 자리잡혀 있어서 가족사랑, 장유유서의 모습이 현재의 한국만큼이나 강하게 실행되고 있다고 말들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모습들은 유교적 사고에서 나온 행동들이 아닌 듯 하여 의아하거나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 녀석들이 내가 외국인이라고 무시를 하는 건가?'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만 적용되는 유교적 관념인가?' 등등

직원회식.png 직원들의 회식자리 : 퇴근후 상하관계는 바로 무너진다

베트남 유교에 대해 살펴보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베트남 유교의 독특한 특징을 다룬 '베트남 왕조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 재밌는 썰을 좀 풀어볼까 함'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유교 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였지만 베트남의 유교 문화에는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었는데, 베트남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편하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다.음.... 조선에서 왕과 신하들의 관계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수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면, 베트남에서의 왕과 신하들의 관계는 사석에서는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였다. 베트남에서는 사석에서는 신하들이 왕에게 말을 놓을 정도로 수평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신하가 왕에게 기분 상할 일이 있으면, 그 신하의 권력이 강한 경우에는 대놓고 정변을 일으키는 게 예삿일이었고 그 때문에 정변으로 인한 왕조 교체가 꽤 자주 있어왔다고 한다.

즉, 베트남의 유교 문화는 수평적인 것이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이 부족할 수 있다는 단점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대부들과 백성들도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농담 따 먹기를 하는 게 일상인 나라가 베트남이었다고 한다. 공적인 자리만 아니면 사석에서는 이 나라보다 상하 관계가 수평적인 나라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교국가 베트남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사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베트남 쟤네들의 유교 문화는 뭔가 이상하다고 얘기할 정도였으니 베트남 유교의 특수성은 굉장히 유별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dcinside.com 베트남 왕조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 재밌는 썰을 좀 풀어볼까 함 기사 정리 발췌 ]


'아! 그랬구나' 무릎이 탁 쳐졌다. 역사적으로 이전부터 그런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라는 고민이 뒤를 따랐다. 신하가 반말을 하면 '저 역적놈에게 사약을 내려라'하면 끝날 것을 ...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에서 이렇게 안 되는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베트남 왕조의 군사 조직을 찾다 실마리를 찾았다. 베트남의 마지막 중앙통치 집권 왕조인 응우옌 왕조에 대한 나무위키의 설명이다.

응우옌 가문은 16세기 이래 베트남 북부의 탄호아 지방을 다스리는 유력 가문이었다. 응우옌 가문은 옛날부터 베트남 일대에서 꽤나 힘을 쓴다고 널리 알려져 있던 대귀족 가문이었는데, 965년에는 딘 왕조 아래에서 재상직을 맡기도 했고 레 왕조 시기인 1442년과 1453년 사이 동안에는 섭정직을 맡아 어린 황제 대신 베트남을 대신 통치할 정도로 그 권세가 높았다.

1527년 막 가문의 막당중이 레 왕조의 공황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하자, 레 왕조에 충성을 유지하던 응우옌 가문과 찐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막 왕조를 거꾸러뜨리기 위한 반란을 모의했다.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은 탄호아 지방에서 반란군을 일으켰으나 얼마 가지 않아 진압당해 인근의 란쌍 왕국으로 도망쳐 일시적으로 세를 추슬렀다. 당시 반란군들을 이끌던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낌은 레 왕조를 추종하던 자들을 모아 반란군의 세를 불렸으며 1540년에 다시 돌아와 탄호아 지방을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응우옌 김은 1539년에 레 왕실의 장종을 복위시켜 중흥 레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레 왕실은 유명무실한 꼭두각시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에게 나뉘어져 있었다.

베트남 왕조는 최대의 중앙통치 시대에도 지역별로 각 지방 세력이 군사조직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나름의 통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북부의 대월과 사운 참파왕국이 도시국가의 성격으로 대월의 침략에 시기적으로 적절히 결집되지 못해 쇠망한 것처럼, 베트남은 중앙집권에 의한 통치가 아닌 분권의 형태를 유지한 국가였던 것이다. 현재의 베트남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베트남의 정치는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보이는 1인 독재 정치가 아닌 '공산당의 영도 아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왕조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가 약한 상태였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사병을 보유하고 왕과 상대할 수도, 왕조를 교체하기도 한 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베트남은 유교의 사상과 통치체계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중앙통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지방 분권에 기반을 둔 느슨한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상황에서 완전한 상하관계가 아닌 병존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는 역사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고대 고구려의 재가회의와 신라의 화백회의를 상상하면 될 듯 하다. 신라의 화백회의에서 상대등이 상석에 앉았슴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다섯 명의 대등도 모두 평등한 권한과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베트남에서는 중국과 한국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상하관계에 의한 유교적 질서가 아닌 평등에 기반한 상호 존중의 질서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수평적이고, 분권적인 사회 구조속에서 여성들은 여성 나름의 자산을 축적하고 가정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이 있을 시 주체적으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저항한 이유 또한 가장 중시하는 자기 가정,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필연적 선택이였으며 그 이후에 당연히 보상받고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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