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학년이 올라갈수록 들고 다녀야 할 책들이 많아졌다. 어깨에 부담이 되었고, 마음에도 한 짐이었다. 수학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던 학생으로서, 두껍고 무겁다 여기며 미워할 만큼 불친절한 책이라 생각했던 참고서는 <수학의 정석>이었다. 교육열이 치열했던 나의 고등학교에선 교과서를 보조 교재로 쓰고 <수학의 정석>을 본 교재로 활용하는 수학 선생님들이 이상하리만큼 많았다. 때문에 책가방 한쪽엔 늘 짙은 녹색의 하드커버, 그 두꺼운 책이 있었다.
참다 참다 <수학의 정석>을 갖고 집 앞 문구점으로 향했다. 주제별로 책을 분해해 스프링으로 제본해 달라는 의뢰를 넣었다. 주인아저씨께선 어려운 일 아니라는 듯, 책을 달라고 손을 내미셨다. 두 손으로 고이 건넨 <수학의 정석>이 눈앞에서 뜯겨 나갔다. 그토록 존재감을 과시하던 하드커버도 벗겨졌다. 후련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죄를 짓는 기분도 들었다.
스프링 제본 앞 뒤에는 하드커버 대신 얇은 플라스틱 커버와 분홍색종이가 들어갔다. <수학의 정석>이라고 믿기지 않을 무게와 포스! 놀란 마음에 표지를 몇 번이고 만져 보았다. 미끈 미끈하고 손가락 지문이 표면에 찍혀 나왔다. 아빠는 '책을 소중히 다뤄야지!' 하는 생각이 앞섰는지, 네다섯 권으로 조각난 <수학의 정석>을 측은하게 바라보셨다.
우리 가족은 (특히나 아빠는) "우산 없이 책을 들고 귀가하는 중에 소나기를 맞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사람이었다. "손에 든 책을 품 안으로 숨기고 나서야 뛰겠죠. 옷이나 머리는 말리면 그만이지만 책은 아니니깐요."하고. <수학의 정석> 한 권을 분해해 소분할 제본을 맡기는 데도 큰 결심이 필요했던 걸 보면,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 책은 보통 물건이 아닌가 보다. 물건이 무어라고 그렇게까지 하냐는 핀잔이 들을 수도 있겠지만, 비를 맞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건 오히려 기뻐할 일로 보인다.
이른바 '<수학의 정석> 스프링 제본 사건'을 겪은 자에게 유독 인상적이었던 유럽의 한 서점이 있다. 보도블록을 밟는 일이 물 위를 다니는 일보다 더 드물고, 겨울에는 정기적으로 아쿠아 알타(acqua alta; 침수 현상)를 겪는 도시, 베네치아에 위치한 '침수 서점(Libreria Acqua Alta)'이 그 주인공이다.
침수 서점엔 고양이들이 산다. 꼬리를 살랑, 엉덩이를 씰룩. 판매 엽서와 도서 위에서도 기지개를 켜고 낮잠을 자는 녀석들은 서점 앞 가판대에서부터 내부와 창고, 계산대 뒤편 등 서점 구석구석을 자기 집처럼 쏘다닌다. 책 사이를 누비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고 입구에 영어 문구를 내걸어 둔 것이 혹시 저 고양이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산대 옆 넓은 서가 중앙에는 곤돌라 하나가 놓여 있어 이곳이 베네치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 위에 책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걸 보면 곤돌라에 타는 건 사람만이 아닌가 보다. 고서적 책방 같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취급 상품은 의외로 다양하다. 베네치아 사투리로 쓰인 <어린 왕자>를 비롯한 지역 한정 도서들이 많은 걸로 보아 베네치아에 대한 사장님의 애정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가게 중앙의 곤돌라를 지나 정면에 보이는 문으로 나가면 뒤뜰이 나온다. 곤돌라가 지나다니는 수로 쪽으로 낮은 벽돌 담벼락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엔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를 밟고 올라가면 담벼락에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는데 사진을 찍기도, 베네치아의 골목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아 보였다. 눈앞에 산이 있기에 올라보았다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계단을 성큼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계단을 이루고 있는 게 책이다!
책들의 모양새가 영 형편없다. 무언가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모습이다. 풀이 죽어 있고, 타박상도 여기저기 보인다. 젖었던 흔적이 가득하다. 그것도 흠뻑. 고전 영화 속 무능한 경찰처럼 범죄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기분이다.
기후 특성상, 침수 서점에선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책들이 아쿠아 알타 때마다 젖어 나간다. 판매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손상된다. 관련하여 서점 왼쪽 뜰에 마련된 모니터는 침수는 늘 있는 일이라며 인터뷰에 담담하게 응하는 서점 주인의 영상을 재생 중이다. 가게 안으로 물이 들어차는 모습, 책들이 유영하는 장면. 초현실까진 아니더라도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어느 현대 미술가의 실험 작품이라 믿고 싶은데, 매년 베네치아와 침수 서점이 겪는 폭풍우 같은 거라니 놀랍다.
젖은 책들은 쓸모가 없어졌다면서 폐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 권의 책은 끝까지 책으로 곁에 두겠다는 침수 서점의 철학에서 가족들의 변론이 들리는 듯도 했다. 결국엔 해체되고 버려진 <수학의 정석>의 하드커버도 한 목소리 거들었을까. 서점 뒤뜰, 책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