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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현 Jan 03. 2024

바르되 여행기

바르되 여행기 1

가고 싶은 곳들을 지도에 모아두는 게 나의 소소한 취미였. 그래서 도무지 이번 생에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곳들이라도 모두 저장을 해뒀다.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혹시 모를 언젠가를 위해서 저장을 해두는 것이다.


바르되(Vardø)라는 섬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의 건축 때문이었다. 많지 않은 그의 건물들 중에 하나가 그곳에 있었. 그때만 해도 스칸디나비아반도 북쪽 끝에 있는 이 섬을 가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건축은 위치들 마저 평범하지 않구나 싶었다.


내가 추구하는 여행은 일종의 '힙스터 병'과 비슷했다. 접근성이 떨어지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곳이야 말로 최고의 여행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정말로 내가 직접 이곳을 알아가고 세상의 방해 없이 온전하게 무언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바르되에 가기로 했다. 위치부터 너무나 인상적인 그곳은, 안 그래도 사람이 없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도 북서쪽 끝에 있었다. 그런 곳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사진으로 본 섬의 풍경도 신비로웠다.


배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섬의 모습.

그래서 유럽 여행을 계획하던 중,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르되로 가는 교통편을 찾아보았다. 그곳에 가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공항에서 밤을 새우고, 인근의 시르케네스(Kirkenes)라는 도시에서 1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딘가를 가기 위해 비행기를 갈아타고, 배를 타고, 계획에 없던 시골도시에서 잠을 자는 것 모두가 그리 싫지는 않은 일이었다. 매일같이 보던 유투버 '빠니보틀'이 된 것만 같았다.


섬에서 대륙쪽을 바라본 풍경

도착한 그곳 일대는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구름 아래로 내려오니, 돌과 이끼밖에 없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졌다. 화성에 착륙해 밖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척박한 대지에 해안을 따라 가끔씩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르되였다. 그곳은 육지에서 3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작은 섬이면서도 사람들은 굳이 이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아마 이곳에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라면, 어업을 위한 작은 항구가 있다는 점이나, 나토군의 레이더기지가 있다는 것 정도 일 것 같다.



기후

북극권에 위치한 이 동네는 기후가 남달랐다. 10월에도 기온은 영상과 영하를 오갔고, 눈+비와 우박이 계속 내렸다. 무엇보다도 바람이 너무 강해서 비옷이 없다면 비를 막을 수도 없었다. 막상 시르케네스의 공항에 내리자 안그래도 삭막한 풍경에 악천후까지 겹쳐져서, 기대감이 억누르고 있었던 우울함과 외로움이 고개를 들었다. 풍경과 기후가 만드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라는 걸 느낀다.



또 여기 있는 동안 바람이 너무 심해서 내가 타고 돌아갈 배와 비행기가 끊기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해야 했다. 실제로 섬을 떠나는 날 예약했던 배가 파도 때문에 항구에 들어오지 못했다.


바르되와 그 인근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은 딱 하루밖에 없었다. 그나마 맑은 날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매일 비가 오는 바람에, 아침이 되면 땅이 꽁꽁 얼어서 완전히 빙판이 되었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끄러져 넘어졌다. 신기하게도 이곳 사람들은 그게 일상인 듯, 빙판길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스쿠터를 타고 잘만 돌아다녔다.



극지방이라 그런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사막에 모래폭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안개가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넘어오기도 한다.


마을

바르되의 집들은 대부분 목조로, 2~3층정도 되는 작은 규모였다. 영화 '업'에 나오는 집처럼 풍선을 타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작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집들이었다. 밤이 되면 집들은 모두 창가에 있는 램프들을 켜 놓았고, 마치 산타를 기다리는 크리스마스의 마을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한밤중에도 돌아다니기에 위험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주민들도 매일 같이 사진을 찍으며 이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았고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동화속에 나올 것 같은 아기자기한 마을은 아니지만, 황량한 주변 풍경과 대비되는 굉장히 평화롭고 포근한 마을이었다.


맑은 날 마을의 사진들


극광

이곳은 극지방인지라 10월임에도 해가 정말 짧았다. 오후 4시쯤부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북극권 특유의 극광 같은 것들이 보였다. 어두운 곳에 가니 희미한 오로라도 볼 수 있었고, 특이하게도 한밤중에도 북쪽 하늘은 동트기 전처럼 미약하게 밝아져 있었다. 아마 한겨울이 되어서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을 때에는 이런 일종의 박명이 계속되는 상태이지 않을까 한다. 이곳에서 맑은 날 밤하늘을 하루밖에 못 본 것이 아쉽다.


오로라는 눈으로는 잘 안보였지만 사진에는 나름 그럴듯하게 찍혔다.
바르되에서 찍은 밤하늘 사진과 북쪽 하늘의 희미한 빛을 찍은 사진.


섬 돌아다니기

이 섬은 크지 않아서 머무는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맘먹으면 하루에 다 돌아다녀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피곤한, 그 정도 사이즈의 섬이다. 아마 여의도 정도의 크기이지 않을까 싶다.


마을이 있는 섬의 남쪽을 벗어나 북쪽으로 더 가다 보면 돌과 이끼가 자라는 들판이 나온다. 근처 지역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툰드라의 들판이다. 곳의 이끼들은 두꺼운 쿠션 같아서 맨땅을 밟고 다니는 것이 기분이 참 좋다. 워커 같은 방수가 되는 신발이 필다.


바르되의 위성사진 - Google 지도


작은 언덕 위엔 2차 대전 때 썼던 벙커가 있고, 여러 동굴들로 이어져 있었. 람도 없고 특별한 안내도 없어서 위험하긴 하지만 폐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탐험이었다. 이렇게 세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곳까지도 군사적 충돌의 흔적들이 많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어딘가 신비로운 조형물도 있었다


풍요에 대하여
노르웨이가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곳은 내가 생각한 잘 사는 나라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사람들은 실용적이고 검소했다. 부유하다고 해서 고급스러운 집에 살거나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한국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가 부유한 것과 개인이 부유한 것은 다른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가 보기에 그들은 낡은 집에 살고 오래된 차를 몰았다. 내가 묵었던 이곳 집들도 마루가 삐걱거리다 못해 위층의 발걸음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집을 고치고, 자동차를 수리를 했다. 주민들이 밖에 나와 이런 작업들을 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풍경이었다. 어쩌면 진정으로 여유가 있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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