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이상신호가 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매 번 움직이지 않을 정도가 돼야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갔다.
나 외에도 이처럼 병원을 가지 않는 사람도 분명 많을 것이다.
병원을 싫어하는 이유는 특유의 병원 냄새, 내 몸이 아프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지금 이 증상은 하루 자고 일어나면 낫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등 많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병원을 방문한 건 이마가 찢어지고 응급실에 내원했을 때, 맹장 수술, 왼쪽 팔 인대 문제로 인한 깁스 외에는 없던 것 같다. 이렇게 보니 의외로 건강하고 튼튼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튼튼한 게 분명 맞았다. 아픈 게 싫었던 게 아니라 아프다는 느낌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내 아픔은 언제부터 시작이었을까?
몸의 아픔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마음의 아픔이 먼저였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내 몸은 아프지 않았었다. 단지, 감정을 참는 습관이 있었다.
타인에게 좋지 않은 나의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했고 나는 어디든 행복한 사람이길 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보여주려 했었고 대부분의 책임을 나 스스로 지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불행 중 다행히도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많다.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살고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듣고 나도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마음속 나의 진실된 시선이 거짓말이라고 그건 착각이라고 조금씩 말을 했었다.
나의 긍정적인 마음은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안 좋은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것들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고, 억지로 하는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습관이 남아 있어 겉으로 티를 내지 못했다.
스트레스는 조금씩 쌓이며 내 마음에 요동을 주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관계, 하고 있던 일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
왜 이렇게 불안했을까. 뭐가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쌓이던 스트레스의 방엔 한계라는 게 존재했고 영원할 것 같던 한계는 한순간에 터졌었다.
심리적으로만 고통을 주던 스트레스는 더 이상 마음의 병으로만 남지 않았다.
몸에 하나둘씩 이상을 주기 시작했다. 작게는 손발 떨림부터 몸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지기도 하고 심박이 빨라지기도 느려지기도 했다. 신체리듬이 금이 갔다.
몸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저 반응할 뿐.
치과는 언제 가야 가장 좋은 건지에 대한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는 말이 맞는 것처럼.
몸에 대한 관리도 정신에 대한 관리도 기다림은 더욱 큰 후회를 남길뿐이다.
나라에서 건강검진을 매년 주기적으로 권고하는 것도 결국 아파서 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프기 전 또는 숨겨져 있는 아픔의 징조들을 미리 찾아내 예방하라는 의미다.
몸에서 이상신호가 아닌 통증이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돌이키기 힘들 정도의 병이 나타났다는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공황장애, 심리적인 힘듦을 갖고 계신 사람들의 통증은 위부터 시작한다.
예전 병원 검진 때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장기 중 가장 예민한 곳은 위라고.
정상적인 사람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안되거나 속이 쓰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생각으론 공황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위와 심장에 관한 이상증세는 세트처럼 나타난다.
참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불편한 곳에서만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인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움직이는 데 영향을 주는 곳들에서만 난리가 난다.
이것도 신의 뜻인지, 일상생활에 영향이 있어야 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작은 경고인 걸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또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몸에 대한 관리는 필수고 소중한 사람에게도 그 관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심적인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면 모른 척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그 이야길 들어주었으면 한다.
그 짧은 한탄을 5분만이라도 들어준다면 그 사람은 그 밤을 푹 잘 수 있는 편안함을 만들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