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오늘이 될 뻔 한 어제

제주올레걷기 2 - 4.3평화공원

by WonChu

순례로서의 올레


멋진 경치가 멋진 여행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행을 빛나게 하는 것들은 오히려 경치 바깥에서 올 때가 많다.

무료하고 고단한 일상이 여행을 간절하게 하고,

작고 큰 고난들이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만들며,

지난 역사에 대한 관심이 풍경의 지평을 무한대로 넓힌다.


성 야고보의 고행으로 산티아고가 성스러운 순례지가 되었듯

제주4.3으로 올레는 아프고도 숭고한 평화순례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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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에 오르기 전, 당연히 4.3평화공원 참배로 여정을 시작하리라 마음 먹고 왔지만

막상 공항에 내려서는 그곳에 가기가 망설여졌다.

일 년 내내 작업에 매달리다 번아웃이 되고,

한 달 내내 12.3내란으로 애간장이 다 녹아버린 터에

그간 무심했던 비극적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놀러 왔을 땐 놀러 왔다는 이유로, 쉬러 왔을 땐 쉬러 왔다는 이유로,

일하러 왔을 땐 일을 하러 왔다는 이유로 대면을 피해온 것이 사실.

이 길을 걷기로 한 이상 피할 수는 없겠지?

이번 마저 피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게 스스로 등을 떠밀어 43-1번 시내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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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


폭설로 입산금지가 막 풀린 산간도로를 버스가 달려올라갔다.

한라산 정상까지는 여전히 출입통제 중.

모두들 절물자연휴양림의 설경을 보러가는지

중산간 정류장에 따라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3평화공원이 춥고 외진 한라산 비탈에 돌아 앉은 듯 놓여있었다.

유골처럼 눈밭 위에 흩어져 있는 위령탑과 희생자들의 묘비.

수많은 이름들 앞에 서니 땅 속 가득 고인 한기가 두 발을 타고 올라왔다.

땅 밑으로 가닿지 못하는 무지한 슬픔이 부끄러워

그 앞에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공원 끝자락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추모관의 문을 여니 곧바로 어두운 동굴이었다.

희생자들의 피신처를 재현한 용암동굴은 마치 타임슬립처럼

방문객을 순식간에 비극의 한 가운데로 빨아들였다.

비록 동굴은 모형이나 어둠은 같은 어둠이라

저편에서 고립된 자들의 두런거림, 발각된 자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


잔뜩 위축되어 어둠을 벗어나 의문의 첫 전시물을 만났다.

바닥에 놓여 있는 육중한 직사각의 대리석 하나.

‘4.3 백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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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 백비, 이름을 새기지 못한 역사

Unnamed Monument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 백비 안내문 전문


새기지도, 세우지도 못한 커다란 비석.

70년 전의 비극과 오지 않은 통일의 역사 사이의 막막한 행간.

그 여백과 질문을 공손히 받아 안았다.

과연 '올바른 역사적 이름'이란 무엇일까?

그 전에 '봉기, 항쟁, 폭동, 사태'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올레를 코 앞에 두고 전시물을 따라다니며 참혹했던 그날의 진상과 마주했다.

오늘이 될 뻔 한 어제가 거기에 있었다.

12.3 그날, 내란이 성공했다면 오늘 전국 곳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겠지?

끔찍한 학살의 전시장에 머무는 서너 시간 내내

몸서리가 쳐지고 치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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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제주4.3'은 47년 '3.1절 기념식 발포사건'부터 56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 장장 7년 7개월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의 지시를 받은 진압군(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제주도민 3만 여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여기서 '4.3'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제주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습격한 ‘폭동’의 날로, '사태'의 원인이 공산세력의 무장폭력이었고, '학살'이 정당한 진압 중 불가피하게 벌어진 것이었음을 공식화 한 이름이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에서는 '폭동' 1년 전부터 ‘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육지로 도망갔던 친일경찰들을 다시 불러들여 복귀시켰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시위를 하며 '봉기'했고, 미군정은 주민들의 반일감정을 무시하고 응원경찰을 더 불러들여 친일파 복권을 밀어붙였다. 반일감정에 반미감정이 더해진 결과, 47년 3.1절 기념식을 맞아 3만 여명의 주민이 행사장인 제주북교에 운집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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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발생한 것은 본행사가 끝난 후였다. 가두시위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관이 탄 말에 치여 크게 다쳤지만, 말을 탄 경찰들은 아무런 조치나 사과 없이 그대로 가려했다.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아니 사과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친일파의 종특에 성난 주민들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고, 경찰들은 곧바로 총을 발포했다. 나중에 미군정은 46년 '대구 10.1사건'으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던 경찰이 공포를 느껴 발포를 한 것이라고 해명을 하였으나, 사상자의 총상으로 볼 때 경찰이 도망치는 군중을 향해 난사를 한 것이 분명했다.


‘경찰의 발포로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 초등학교 학생, 40대 농부 등 6명의 민간인이 숨졌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검안결과,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 총탄이 박힌 사실이 확인되었다.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자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하기는커녕 도리어 정당방위를 주장하면서 시위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을 당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제주도민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 4.3평화기념관 핸드북 ‘한눈에 보는 4.3’에서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분노는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만관합동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파업은 제주도청으부터 시작해 법원, 경찰 등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로 퍼져나갔다. 상점도 문을 닫았다. 166개 기관단체, 41,211명이 파업에 참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제주신보사는 희생자 유족을 돕기 위한 조위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 4.3평화기념관 핸드북 ‘한눈에 보는 4.3’에서


'4.3폭동' 훨씬 이전에 '봉기'가 있었고, '3.1절 총격사건'과 '3.10파업'이라는 '항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태'의 원인은 구원군으로만 여겼던 미군정의 '친일파 복권' 조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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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아일랜드


제주도민의 '항쟁'에 미군정이 강경 일변도로 대응한 것은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와 정확하게 맞물렸기 때문이다. 47년 3.10파업 이틀 후인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그리스 내전이었다. 트루먼은 중동과 유럽으로 공산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내전에 적극 개입해 승리해야 한다며 의회에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중차대한 시점에서 우리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단히 광범위할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1948년 6월30일까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해 4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제공할 수 있도록 의회가 승인해 주기를 요청한다.

이러한 원조 기금에 추가해서, 나는 재건 사업을 지원하고 또 제공된 재정 원조와 물자 원조의 사용을 감독할 목적으로 그리스와 터키의 요청에 따라 미국의 민간인과 군사 관계 요원을 이들 국가에게 파견할 수 있도록 의회가 승인해 줄 것도 아울러 요청한다. 나는 그리스와 터키의 선발된 병사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킬 수 있는 권한도 의회가 위임해 주기를 원한다.

- <트루먼독트린> 원문 중에서


이 선언으로 미국과 소련을 양축으로 하는 냉전이 공식화되었다. '트루먼독트린'은 '마샬플랜'으로 유럽에 축복을 내렸으나, 한반도에는 재앙을 선사했다. 원조는 유럽에 집중되었고, 관련국 모두 강경파가 득세하며 한반도는 분단으로 치달았다. 본국의 기조에 따라 마군정은 3.10파업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47년 3월부터 48년 4월3일까지 2,500여명 도민을 검속하고, 파업에 참여한 군경과 공무원 전원을 해고했다. 이로써 민심은 미군정을 완전히 떠났다.


47년 4월 3일. 민심 이반을 틈탄 남로당 제주지부는 '남한 단독선거 결정 반대'를 명분으로 무장대를 조직해 경찰서와 우익단체를 습격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레드 아일랜드'가 되었다. 무장대는 중산간으로 도망을 쳤고, 미군정은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전격적인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에 의해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브라운 대령의 일성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계획대로 나간다면 2주일이면 평정되리라고 믿는다....

원인에는 흥미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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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후 6년 여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끔찍하고, 무도하고, 원통하고, 참혹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진압군과 무장대의 평화협상을 깨기 위한 우익청년들의 공작 '오라리 방화사건'(48.5.1), 투표자 과반 미달로 인한 재헌국회 '5.10선거'와 '6.23 재선거' 무산, 해안선에서 5km 이상 금족령 위반시 총살 포고령(48.10.17), 제주도 진압출동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의 '여순사건'(48.10.19), 여수순천에 내려진 이승만의 최초 계엄령, 뒤이은 제주지구 계엄과 미군정의 초토화작전, 미군정의 방조 하에 무법자가 된 서북청년단의 짐승과 같은 만행들...


중산간 동굴에 숨었던 주민들은 귀순자를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해안마을로 내려왔다가 인적 드문 자연 속으로 끌려가 떼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는 다시 동굴로 피신했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6.25가 발발하자 그저 의심이 된다는 이유로 각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는 일제히 총살되어 암매장 당했고, 형무소가 없어 육지 각 곳의 형무소로 보내진 수감자들은 그곳에서 처리되었다...


그렇게 3만 여명의 주민이 희생당했다.

당시 소탕의 대상이었던 무장대 규모는 350에서 500명,

3만 여의 희생자 중 무장대에 의한 학살은 1,500명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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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이름


'제주4.3'의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7년 7개월 간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정, 정부수립, 6.25 전쟁을 거치는 동안 국가폭력의 이유와 책임은 모호해지고, 3만의 희생자만 남았다.


하지만 역사에 우연은 없다. 냉전의 광풍이 제주도에만 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최전선에서 가장 먼 최남단의 섬인 이곳에서, 그토록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사태의 시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아주 먼 옛날부터 매 시대마다 제주에는 육지 사람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역사가 있어 왔다.

식민의 역사도 마찬가지. 그들은 철저히 고립된 채 육지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식민지배를 겪었다.

일제에게 제주도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수탈지일 뿐만 아니라 연합군의 일본 본토상륙을 저지할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동남아시아 전선이 무너지자 9만 여의 주둔군이 섬 전체를 요새화 했다.

주민과 주둔군이 거의 동수에 이르는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전시체제.

쓸만한 청년들은 무력하게 일본 각지로 끌려가 중노동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징용을 피해 섬을 탈출했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가장 늦게 해방이 되었다.

주둔군이 너무 많아 9월 28이 되어서야 따로 항복조인식을 했고,

일본과 육지로 나갔던 청년들 6만 여명이 귀향을 했다.

주민들은 미군정 하에서 좌우익 항일운동가가 중심이 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모범적인 자치를 실시하며 빠르게 공동체를 복원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미군정은 찬물을 끼얹듯 육지로 도망갔던 친일경찰들을 불러 들였다.

친일파 복권은 겨우 활기를 찾은 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는 만행이었다.

그 어느 곳보다 혹독한 일제의 폭정에 시달렸고,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자치조직 하고 있던 주민들은 그 어느 곳보다 강하게 '봉기'했다. 이에 미군정은 '전 주민의 70%'를 좌익으로 매도, '레드 아일랜드'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역사적 이름은 그 희생을 숭고하게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고,

나는 미군정의 부당한 조치에 '항쟁'했던 그들의 역사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제주4.3 항쟁'.

그 이름으로 이곳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난의 역사를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소중한 자손들임을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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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될 뻔 한 어제


한 번의 관람으로 다 알 수도, 다 느낄 수도 없는, 버거운 대면이었다.

한 달 전 내란이 성공했다면... 하는 생각이 겹쳐질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힘들었고,

그 참혹한 사태를 목전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은 것이 그저 기적만 같았다.


부끄럽게도 그날 나는 국회 앞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내일부터 펼쳐질 참극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역사적 상상을 할 수 있었다면 용기를 내 달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가 현재를 돕는 일도 과거를 알 때 가능한 일이라는

뼈 아픈 깨달음을 안고 기념관 밖으로 나섰다.


밖은 2025년 1월 12일.

텅 빈 도로의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

올레를 걸을 기운이 나지 않았으나 바다가 보고 싶었다.

버스는 생각보다 빨리 달려왔다.

평화공원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떠밀리듯 올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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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동안 제주도 반 바퀴를 도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역사의 생존자였다.

돌아와 '제주4.3'의 역사적 이름을 찾는데 다섯 달이 걸렸고,

어제가 될 뻔 했던 오늘의 그 '내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반 년 간 끈질긴 '반란'이 계속 되고 있고,

'항쟁'은 끊임없이 기적을 만드는 중이다.


2025년 6월 3일.

우리는 모두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만든 '항쟁'의

생존자이자 주인공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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