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2022)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 하나는 환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그 정체가 시간 때우기든 뭐든 찌든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환영 속으로 잠시 도피하고자 하는 바람이 크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 환상 속에서 현실을 간간이 드러내는데 그런 점이 영화 관람의 묘미인 것 같다. 환상과 현실, 그 경계를 넘나들며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덕분에 극장을 나선 뒤에는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이하 바르도>(2002)는 아마도 이런 나의 구미에 맞는 작품 같다. 환상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환상을 과감없이 드러내니 말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향한 일반적인 평가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 총평이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혹평만 보면 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조금은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평가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이하 알레한드로)를 향한 어떤 기대감을 드러낸다. <버드맨>(2015)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탄 이력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가 이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렸을까. 그런데 뚜껑을 얼어보니 난해한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그러니 저런 평가는 당연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적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으로 <바르도>를 추천하고 싶다.
아마 많은 관객은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환상 때문에 처음에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실베리오(다니엘 지메네스 카초)의 아내 루시아(그리셀다 시칠리아니)가 아이를 출산한 장면을 보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의사는 아이 말에 귀 기울이더니 부모에게 말한다. 세상이 좆같아서(?) 다시 들어가고 싶다나 뭐라나. 그리고 나서 아이는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이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할 것 같다. 또는 헛웃음을 지을지도. 그러나 약간의 인내를 발휘한다면 저 환상이 어떤 의미인지 나중에 드러난다. 세상을 향한 불평을 늘어놓은 아이는 다름 아니라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아이라는 것을. 아버지 실베리오의 환상 속에서 아이의 죽음은 저런 식으로 표현됐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 <바르도>는 그 제목마냥 처음부터 끝까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다. 그런 이유로 끝까지 보지 않는다면 부분적인 환상은 파편적인 조각처럼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런 까닭에 이 영화를 보는 여정은 그 상영 시간만큼이나 인내를 발휘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160분이라는 러닝 타임을 견뎌낸(?) 사람이라면 처음의 물음표가 끝에서는 느낌표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전체 맥락 속에서 씨줄과 날실이 이어져 저 환상이 비로소 이해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양립 불가능한 온갖 사건으로 가득 찬 이유는 실제로 주인공 실베리오의 꿈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인 실베리오는 미국에서 시상식을 앞두고 고향 멕시코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갑작스런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고 만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 인물이 무의식적 꿈 자체다. 그러니 영화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이런 전후사정을 알리 없는 관객은 시작부터 난해하다 느끼고 지루하다고 결론 내리기 쉽다. 그러나 이야기 끝에서는 ‘아하!’라고 소리칠지 모른다. 끝에 이르러야 수수께끼 같은 장면이 이해된 덕분이다. 이 영화는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 주인공의 자아성찰기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영화는 주인공의 삶에서 중요한 인물과 사건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령 지금은 죽어 만날 수 없는 인물일지라도 말이다.
영화적 묘미를 나는 프레임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 간극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가끔 그 선이 무너질 때가 있다. 바로 그 순간이 영화가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때이다. 그때 비로소 영화와 우리는 대화를 시작한다. 때로는 그 대화가 불협화음일지라도 언제나 나는 그 찰나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