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2를 봤다. 위키드 1이 더 재밌다는 평이 중론인데, 나는 2편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2편이 더 스토리가 풍부하기 때문이겠지. 내 취향은 그쪽이니까. 결국은 어떤 선도 어떤 악도 100%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지만, 세상이 나를 억까한다고 느낄만한 일도 많지만, 이해 못 할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과 중요한 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통과하는 방식이라는 교훈을 멋있는 방식으로 보여준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6권짜리 원작이 읽고 싶어 져서 1편을 시작했다. 찬 바람이 가시기 전에 끝낼 수 있기를. 영화 속 엘파바는 이렇게 묻는다.
Are people born Wicked?
Or do they have Wickedness thrust upon them?
악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은 경계해야 하지만 악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 악은 선을 잘 알지만 선은 악을 잘 모른다고 했던가? 예상보다 훨씬 철학적인 영화였다. 내 인생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였다. 위키드 역시 결국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마법이란 서로에게 기적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일 아닐까. 글린다와 엘파바처럼.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다.
가까운 친구들을 떠올리면 내가 무슨 복으로 이런 친구들을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있을까 생각한다. 궂은날마다 출근길 걱정해 주는 친구, 맛있는 거 보면 꼭 같이 먹자고 연락하는 친구, 웃긴 일 생기면 꼭 전화해서 나도 웃게 만드는 친구.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매일 만나는 가장 큰 기적은 매일 불의의 사고 없이 가족 모두가 무사히 아침에 흩어진 모습 그대로 다시 모여 밥을 함께 먹는 일이다. 잠들기 전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다. 큰 병 없이 올해를 무사히 지나는 것 또한 기적일 것이다. 기적이라, 연말에 떠올릴 법한 말이다.알베르 카뮈가 말했다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 이 말대로 산다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겠지. 작은 연민이 누군가에겐 기적이 될 수도 있고 수많은 악의 씨앗을 잠재우기도 하겠지.
저녁에 엄마가 정수기 아래 받쳐놓은 컵에서 물이 넘쳐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까지 흠뻑 젖어버린 걸 발견했다. 선반 아래까지 물이 흘러 들어가 있었다. 엄마는 항상 500ml 버튼을 누르고 컵을 가져다 댄다. 아무리 잔소리해도 매번 컵이 넘치게 만드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물이 넘쳤다. 어디까지 물이 퍼진 건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물이 나와서 한참 동안 물건과 선반을 들어서 옮기고 닦아냈다.
우리 집엔 500ml를 담을 컵이 없다고 했잖아. 대체 매번 왜 그래.
하고 짜증을 냈는데, 어쩐지 엄마가 저녁 내내 지치고 피곤해 보여서, 그렇게까지 짜증 낼 일이었나 싶어 후회했다. 작은 일엔 연민으로 충분한데. 나에겐 엄마가 쉬운 사람이라 그렇다. 미안한 일이다. 몇 해 전,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었다. 작가와 그녀의 엄마 사이 지긋지긋한 애정에 대한 에세이였다. 제목에 워낙 강렬해서 고른 후 단숨에 읽어버렸는데, 지금 문득 그 책이 다시 떠오른다. 내 애착이 너무 사납다.
12월 동안만이라도 온순하게 엄마가 싫어하는 잔소리 덜 하면서, 작은 연민으로 짜증을 덮으면서 엄마에게 사소한 기적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겠다. 눈치가 워낙 없으니 엄마는 알아챌 리 없겠지만, 나는 노력해 봐야지. 특히 크리스마스엔 서로 즐거운 나들이가 되도록 오늘의 다짐을 반드시 기억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