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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펑예 Sep 10. 2024

T의 싸움회피법

부글부글 끓어 오를 땐 그냥 한숨 자자 

오전에 언어치료 수업이 있었다. 수업 후 상담 타임 때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빠와 함께하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아빠랑 노는 그림도 있고 아빠가 선물 주는 그림도 있고 요리하는 그림도 있지만 매번 '아빠는 일하러 가요'라고만 하네요."


아, 정말 웃펐다. 생각지도 못한 고망이의 속마음이었던 것이다. 최근 한 달이 넘게 고망이가 본 아빠의 모습이란 오전에 잠시, 인사하고 둥기둥기하다 "아빠 일하러 갈게~ 안녕."이 다였고 분명 그에 대한 섭섭함이 반영된 반응이라 추측되었다.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알았다면 아마 이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아빠는 맨날 일하러 간다고 나가기만 해요." 


저녁에 가게로 가서 오픈 준비하는 틈에 그 이야길 꺼냈지만 J는 "그래? 근데 어쩔 수 없으니 뭐."하고 만다. 지금은 마치 내리막길로 브레이크 고장난 수레가 출발한 격. 무를 수도 없고 서운한 소리한다고 타박할 수도 없었다. J는 그런 소리를 받아낼 한줌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며칠 전 이틀 간의 휴일로 한숨 돌리긴 했다. 하지만 체력 회복이 안 되다 보니 부자간 진한 시간을 보내긴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여행도 건너뛰었다. 나는 부자간의 유대 전선이 신경 쓰였다. 육아는 함께하는 것이라든지 가족끼리 화목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고망이의 성장 발달에 있어 J의 역할이 참 중요하기 때문이다. 


J는 애초에 아이를 굉장히 원하지도 않았고 말하자면 아빠라는 자의식이 약하고 서툰 사람이었다.(이건 자라온 환경 탓이 클 것이다) 그래서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도 "축하해요~"라는 남의 집 경사 듣는 듯한 반응으로 빈축을 샀고 신생아였을 시절도 나름 노력하고 예뻐하긴 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진땀을 빼다 육아 스트레스로 불길을 내뿜는 나에게 급기야 "아이가 태어난 게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는 아주 솔직한 망발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고망이의 사회성 문제가 대두된 후 그 충격에 J는 좀 달라졌다.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반응해줬다. 고망이가 잠에서 깨면 하이톤으로 반기며 아침 인사를 했고, 고릴라가 되어 이 방 저 방 태우고 다니고 천장까지 들어올려 주는 등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놀이인 몸놀이를 수시로 해줬다. 같이 노는 시간은 비록 적었지만 영혼이 담뿍 실려 있다고 인정할 만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한 효과로 나타났다. 계속 지적받아온 상호작용이란 것이 쭉쭉 느는 게 보였으니 말이다. 고망이가 아빠라는 존재를 인정했던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마치 "영혼 있게 놀아주는군. 내 너는 좋아해 주겠다."라는 듯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어찌나 힐링되는지. 엄껌에 지친 탓인지 나는 고망이가 나 외에 누군가와 즐겁게 지내는 장면을 보는 게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현재는 2호점 개업이라는 빅 프로젝트에 짓눌려 고망이와 시간을 갖는 것은 완전히 뒷전인 데다 심신은 지쳐갔다. 수시로 예민 모드가 되었고 그러면 나 역시 J에 대한 불만이 조용히 끓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이 먹어 좋은 것이 뭔가. 경험치가 높고 싸울 기력도 없다는 것. 

소모적인 감정 싸움은 가뜩이나 없는 에너지를 더 고갈시키고 가게는 물론 결과적으로 고망이에게 해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방법을 찾아나갔다. 큰 방향을 이야기하자면 F끼 싹 빼고 T로 대하는 것이다. 가게에서는 어차피 사무적으로 대하면 됐고 오프일 때가 문젠데, 감정싸움이 발발하기 쉬운 상황에 대한 대처는 다음과 같다. 


상황1. 고망이랑 놀다가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구체적이고 짧은 지시)

"또 핸드폰 보네. 아이랑 놀 땐 아이한테 집중을 해야지. 조금밖에 못 놀아주면서."보다는

"고망이랑 놀 때는 핸드폰 저리 치워요."


상황2. 키카에서 자리에 앉아 핸드폰 보고 있을 때(간단 명료한 제스처)

"앉아서 뭐해요? 고망이랑 좀더 적극적으로 놀아줄 생각을 해야지. 하루 겨우 같이 노는 데 말이야. 어쩌구~"보다는 아이를 따라가라고 수신호를 보냄 


상황3. 휴일 저녁에 술자리 약속에 가야 한다고 할 때(바꿀 수 없는 일은 빨리 포기하고 이득 취하기)

"수울 자리? 피곤하다면서 술을 마시러 가? 모처럼 쉬는 날 가족이랑 보내야지. 우리를 조금도 생각 안 해!"보다는 "(어차피 갈 것이고 컨디션 조절도 자기 몫이기에) 너무 늦지 않게 와요. 대신 다음 달에 자유시간 가질게."


매사 로봇처럼 그럴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애쓰면 불필요한 분쟁을 많이 줄일 수 있다. 오프일때 J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은 고망이와 영혼 있게 놀아주는 것이고 그것은 애당초 자발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답답해서 속이 터지더라도 기다리면 만족할 만한, 혹은 그 이상의 상황이 (가끔) 연출되니까. 플러스 고망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 둘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도 중요하다. 가벼운 앙금이라면 사르륵 녹아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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