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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진 WonjeanLee Oct 03. 2016

놀이의 재발견

모두가 즐거워야 그게 놀이지: 여민동락(與民同樂)

한자에서 “즐거울 락(樂)”은 참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음악' 할 때의 락이다. 


나는 올해 5월부터 '씽투육아'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서 씽은 think이기도 하지만 sing이기도 하다. 

즉 생각하는 육아, 노래를 부르는 육아란 뜻이다. 

매 달 한 번씩(마지막 주 목요일) '씽투다이닝'이라는 소셜다이닝을 마련했다. 

마의 시간으로 불리는 저녁 5~9시(아이를 데려와서 저녁먹이고 씻기고 놀려서 재우는 것)

를 같이 견디며 노래도 부르고 수다도 떨어보자고 마련한 행사다. 

여기서는 '복태와 한군'이라는 부부 뮤지션이 나와서 

엄마들의 이야기에서 직접 가사를 끌어내고 거기에 음악을 입혀

즉석 노래를 만들어준다. 

아이들과 엄마에게 직접 작사 작곡한 동요 하나씩을 선물해주는 셈이다. 

지난번엔 '기상송'을 만들었는데 

덕분에 나는 아이들이 늦게 일어날 때는 이 직접 만든 '기상송'으로 깨우고

주말에 내가 늦게 일어날 때는 아이들이 나를 '기상송'으로 깨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6장) 19절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자왈 지지자 불여호지자요, 호지자 불여낙지자니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


논어에 나오는 말 중에서 아마 굉장히 대중적으로 유명한 말일 것이다. 

요즘 T자형 인재라는 말이 있듯, 자기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 한 우물을 파서 

그 분야 최고에 오르면 다른 분야 최고들과 다 만난다는 뜻을 가진 

소위 직업선택 같은 데서 많이 쓰는 어구로 오히려 익숙한 말이다. 


논어의 이 구절을 이루는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知, 호好, 락樂을 비교한 것이다. 

즉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 세 가지다. 

이것과 함께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살펴볼 수 있다. 

여민동락에서 볼 수 있듯 락은 같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 좋은 세상>이다. 


아는 것知이 제일 먼저다. 안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를 안다는 거다. 

그 다음의 호好는 혼자서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인데(요즘 말로 덕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락樂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같이 즐거워하는 상태의 감정으로, 공동체의 개념을 담고 있다.


백성과 함께 즐기는 것, 

즉 혼자 노는 것보다 같이 노는 게 재밌다는 말이다. 

놀이라는 것은 다 같이 즐거워야 좋은 것이다.  

아이가 '놀이터'와 '키즈카페'에서 노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면

놀이터에선 누구도 빠트리지 않고 다 같이 재밌게 놀아서 재밌다. 

돈으로 편을 갈라 여기는 돈을 낸 사람만 들어와 

이런 생각이 들어가면 재미없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맹자>에 이어서 이런 얘기가 나온다.

맹자를 양혜왕을 찾아서 “음악을 좋아하시니 정치를 잘하시겠네요” 

그래서 왕이 쑥스러워하면서 “선왕의 음악이 아니라 세속의 음악을 좋아합니다” 한다. 

소위 클래식이 아니라 트로트나 힙합을 좋아한다는 거다. 

그랬더니 맹자가 즐거움의 여러 종류를 얘기한다. 

혼자 즐기기/더불어 즐기기, 적은 사람과 함께 즐기기/많은 사람과 함께 즐기기,  

독악락/숙락(더불어즐기기), 여소악락/여중악락(적은 사람과 많은 사람) 

마지막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낙민지락자는 민역낙기락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
우민지우자는 민역우기우

백성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면 백성 또한 임금을 즐거워하고 
백성의 근심을 근심하면 백성또한 임금의 근심을 근심합니다.


맹자는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을 지적한다.  

놀이를 할 때 사람이면 다 좋아할 만한 것(윤리적 문제)을 좋아하면 

그게 너무 좋아 옆에서도 좋아하고 그래서 다 즐기게 되는 거다. 

그게 애초에 ‘(누구에게나) 좋은 것'을 즐겨야 한다.

그게 바로 제대로 아는 것이다. 


백성을 폭압하고 착취하는 걸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거다. 

소위 갑질을 배우기를 좋아하는 재벌 2세나 위정자 2세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차별하거나 폭행하거나 하는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게임으로 비유를 들어보자.

요즘 너무 게임중독이 돼서 불안해하시는 부모들이 많다. 

그러나 콘솔게임 말고 모바일 게임에서 더 잘 나타나는 현상은 

망외부성 효과처럼 플랫폼에 머무는 유저들이 많아질수록 네트워크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같이 즐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재밌어진다. 

특히 일본에 비해 한국과 중국이 이런 분위기가 강하다. 


# 1. 돈 없이 노는 게 진짜 노는 것


사실은 장난감 사달라 떼쓰는 아이들은 

“같이 놀아줘”라는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야 된다고 한다. 

동네 키즈카페를 다니던 아이들은 커서 피시방 아니 다 플스방으로 가고 있고

최근에 생긴 강남역 VR방에 가게 될 것이다.   

사실 페북 등 SNS가 점점 뜨는 이유도, 플랫폼에 사귈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포켓몬고 등도 같이 즐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재밌잖은가. 

놀이가 나쁜 효과를 미치지 않으면 좋은데 

다른 것을 박탈해가는 중독성을 띠게 되면 타락한다. 


놀이전문가 편해문 선생님은 

“잘 노는 건 돈을 안 갖고 노는 법을 배우는 거다”했다. 

자본주의는 잘 노는 사람들이 무섭기 때문에 놀이를 왜곡한다는 거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은 돈으로 구매하지 않고 놀아보는 거 같다. 

비싼 장난감을 사주면 그건 이미 아이들에게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되는 거다.

 

#2. 파이디아(paidia)와 파이데이아(paideia)


놀이는 서양에서도 원래 교육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다. 

플라톤이 <국가> 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게 교육을 놀이로서 접근하는 거다. 

그리스어에서  

놀이는 파이디아(paidia) 

교육은 파이데이아(paideia)다.

페다고지의 어원이 된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는 가정교사라는 말로 아이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공통되는 paidos는 아동을 의미한다. 

아이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 파이디아(놀이)고, 그것이 곧 파이데이아(교육)이란 뜻이 담겨 있다. 


국내에선 편해문 선생님의 <아이는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도 있지만, 

사실 놀이하면 제일 알려진 고전이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Homo Ludens>라는 책이다. 

그는 놀이라는 게 인류 지성의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혔다”고 한다. 


이걸 발전시켜서 놀이의 사회학을 말한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라는 책이 있다. 

카이와는 자크 라캉이 매우 좋아하는 사상가였는데, 

다윈처럼 자연관찰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거기서 카이와가 플라톤의 파이디아를 다시 끌고 나온다. 


파이디아는 놀이 본능의 자발적 속성으로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데 

여기에 규칙이 등장하면서 최초의 놀이가 탄생한다고 한다.

카이와는 놀이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대등한 입장에서 능력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쟁 놀이를 아곤(agon, 스포츠 경기)이라고 한다.

또 우연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우연 놀이를 알레아(alea, 가위바위보, 도박)

정해진 약속에 의한 역할놀이를 미미크리(mimicry, 소꿉장난, 연극)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는 기분 좋은 패닉 상태를 일링크스(illinxs, 소용돌이, 술마시기)라고 한다. 

로제 카이와에게서 주목할 점은 놀이의 타락이다. 


놀이는 현실에서 종종 오염되고 타락하는데, 

예를 들어 경쟁 놀이인 아곤에서 즐기기 위한 규칙이나 심판이 무시될 때 

내재된 약육강식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우연(운) 놀이인 알레아는 더 이상 운명의 뜻을 따르지 않고 

미리 판결을 알려고 사기를 칠 때나 미신에 따를 때 타락한다. 

미미크리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구별하지 못할 때 문제가 된다.  

아이들이 이 네 가지를 적절히 조합하면 좋은 놀이의 순기능이다. 

게임중독은 아마 아곤과 미미크리의 타락일 것이고, 알코올 중독은 일링크스의 중독일까.

아이들이 영상에 빠지는 것은 일링크스와 알레아일까. 


한국엔 어른과 아이의 놀이공간, 놀이문화가 없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다. 

사실 놀이는 꼭 비싼 교구나 입장료가 아니라도, 

다 같이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게 음악이든, 미술이든, 놀이터든 공연이든 게임이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다 놀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공유 경제의 개념에서는 이제 놀이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노동하는 것 그 자체가 노동의 목적인 게 놀이인 거다. 

육아도 놀이가 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키즈카페니, 게임방이니 다 좋지만, 

공동체에 더 익숙한 놀이문화, 돈이 안 드는 놀이공간을 통해 

공부 경쟁 때문에 노는 시간을 잃어버린 아이들 대신, 

놀이밥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게 필요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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