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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 Mar 21. 2024

오래된 이름표

엄마가 저물어간다

엄마가 저물어간다

1997년, 옥은 그때까지 모아둔 돈으로 식당을 차렸다. 오래 다니던 의상실과 멀지 않은 위치에 방 다섯 개, 잔디가 있는 마당, 그리고 넓은 주차장까지 딸린 전원주택이었다. 큰돈을 투자해 2층 전체를 리모델링했고 1층은 식당으로, 2층은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 되었다.  의상실에서부터 쌓아온 동네 인지도 덕분에 식당은 금방 입소문이 났고 오픈하자마자 성황을 이루었다. 식당 운영은 우리 가족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오랫동안 선박 기관장이었던 아버지는 주방장이 되었고, 마침내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발을 붙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불철주야 최선을 다했다. 아침잠이 많던 옥은 매일 새벽시장에 재료를 사기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내방으로 가기 전 손님들로 북적이는 1층을 지나쳐야 했다. 방과 후 돌아온 집에 혼자가 아닌 것도, 식당과 집이 합쳐진 생활도 낯설었지만 아버지와 한 팀을 이루어 일하는 옥을 보며 어떤 안정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새로운 일상이 익숙해질 때쯤 뉴스에는 낯선 영어 알파벳 조합이 연일 보도되었다. 97년 말 대한민국은 IMF라는 전례 없는 경제위기를 맞았고 내로라하는 대기업과 은행들도 차례대로 무너져갔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많은 이들의 삶이 휘청거렸고, 운 좋게 회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점심값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도시락을 싸다녔다. 늘 북적이던 우리 집 1층 식당은 눈에 띄게 손님들이 줄었고, 결국 2년을 버티지 못한 부모님은 큰 빚을 떠안고 식당을 접어야 했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업소용 주방기구는 보호 스티커도 떼기 전에 헐값으로 팔아넘겨야 했다. 아버지는 음식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익숙한 기름냄새가 나는 배를 타러 바다로 다시 나갔다. 그 시절 옥의 얼굴은 늘 부어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보다 생기가 없고 아파 보이는데, 나는 이런 옥이 간신히 켜져 있는 위태로운 호롱불 같다고 생각했다. 천재지변처럼 다가온 국가 부도의 날은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고, 그때 옥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온 세상은 시끌벅적하게 새천년을 맞았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으며 더 이상 걸어서 등교할 수 없는 거리로 이사를 갔다.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1분 1초를 다투던 어느 날 아침, 안방에서 나온 옥이 여느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다며 엄마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수 있으니 다짜고짜 교복 와이셔츠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등교만으로도 정신없는 아침에 중학생 아들에게 난데없이 죽음 이야기를 꺼내는 옥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바빠죽겠는데 아침부터 왠 헛소리냐며 나는 짜증 섞인 한마디를 퉁명스럽게 내뱉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옥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조용한 일상에 갑자기 찾아온 지진처럼 마음이 온통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흔들거렸다. 옥에게 뱉어낸 짜증이 사실 불안을 숨기기 위한 연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을 때쯤 버스가 도착했다. 매일 그렇듯 기계적으로 몸을 실었지만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 버스에서 갑자기 눈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던 눈물을 한참이나 흘리고 나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방과 후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그날 저녁에 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아침은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 속 깊숙이 자리 잡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가끔 맥락 없이 떠올랐다. 감정의 맥락은 언어가 없을 때는 짙은 안개 같았다. 내가 품고 살던 불안을 돌아볼 나이가 되고서야 옥을 향한 내 마음의 기본값이 은은한 슬픔이라는 걸 깨달았다. 옥이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으면 자주 나는 줄이 끊어져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곤두박질치는 연이 되었다. 그녀의 최선을 의심해 본 적 없지만, 어딘가로 떠나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옥에게 그 편이 더 나은 삶이지 않을까 혼자서 슬프게 상상했다. 그래서 상상 속에서도 붙잡거나 매달릴 수 없었다. 슬픔을 삼킨 배려는 옥과 나 사이에는 일종의 거리감으로 존재했는데 우리가 처음으로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던 건 옥이 몇 년 전부터 폐암 투병을 시작하면서였다.  




며칠 전 일주일 만에 옥과 병원을 찾았다. 보통 3주에 한 번씩 왔는데, 내성이 생긴 표적항암제 대신 두 달 동안 썼던 세포독성약물이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난주에 찍은 CT결과가 나왔고 복부림프절이 더 커 보인다는 소견을 전해 들었다. 조 선생님은 친절하게 다른 항암제로 바꾸어 처방을 내려주셨다. 옥이 2층 주사실에서 항암제를 투여받는 동안 나는 언제나처럼 1층 원무과에서 수납을 처리하고 원외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았다. 다시 1층 로비로 돌아온 뒤 보험서류를 처리하고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1시간 정도 지난 걸 확인했을 때 2층 주사실로 향했고, 이쯤이면 항암주사를 완료하고 옷을 챙겨 나오는 옥과 딱 마주치는데 이날도 역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우린 진료와 항암을 후련하게 해치우고 병원을 나섰고 때는 어김없이 늦은 점심이었다. 옥과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단골칼국수집을 찾았다. 따뜻한 칼국수와 비빔 칼국수 하나씩, 그리고 꼬마김밥 1인분. 늘 이렇게 시키면 둘이 기분 좋게 나눠먹을 수 있다. 다음 달이면 6개월 항차가 끝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니 셋이 올 때는 콩국수 곱빼기도 하나 추가해 실컷 먹자고 약속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부턴가 옥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누구도 합의한 바 없지만 입에 올리기에는 조심스러웠던 문제의 단어는 어느덧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100세 시대’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던 옥을 보며 자라서인지, 나는 옥이 자신 앞으로 꽤나 성큼 다가온 죽음을 되려 반갑게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옥은 ‘다 살았다’는 표현을 자주 했는데 어릴 땐 나는 그 말이 슬퍼서 조용히 싫어했었다. 몇몇 가족들은 죽음을 쉽게 말하는 옥이 우울감 때문에 괜한 소리를 한다고 여겼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졌다. 가끔 죽음을 말하는 옥에게서 설명하기 힘든 생기를 느낀다. 요즘은 옥이 ‘다 살았다’는 말을 할 때면 나의 슬픔보다 그녀의 생에 눈을 맞추려 노력한다. 집으로 돌아온 옥이 죽음을 열심히 찾아보는 중이다. 출국 전 여행지를 미리 살펴보듯 여기저기 검색해 보느라 바쁘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어느새 사후 세계, 임사 체험 등등 관련 영상으로 채워졌다. 그중에 인상적인 내용을 발견하면 나에게 링크를 보내어 적극적으로 공유한다. 자신은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엄마가 저물면 어디로 가게 될까. 나 역시 저물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을 곳으로 가게 되겠지. 그곳에서도 우리는 엄마와 아들로 만나게 될까. 엄마도, 아들도, 오래된 이름표처럼 사라지는 곳이라면, 나는 그제야 옥이 누군지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 비로소 나는 저물어가는 엄마가 슬픈 아들이 아닐 수 있을까. 엄마가 저물어 엄마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아들이 저물어 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마침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곳에서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는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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