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자(Knower) 2

by 임풍

어린 시절, 나라는 개념은 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부모와 집,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와 우리를 섞어 쓴다. 나의 집은 곧 우리 집이 되고, 나의 학교는 우리 학교가 되며, 나의 아빠는 아무 의심 없이 우리 아빠가 된다. 이 언어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어, 나의 남편 대신 우리 남편이라는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된다. 나라는 개념은 개인적 주체라기보다 관계 속에 놓인 집단적 존재로 먼저 형성되는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몸에 대해서만큼은 이런 혼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몸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몸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생각과 감정 역시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 나의 감정으로 동일시된다.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는 나와 우리가 하나로 묶이듯, 몸과 정신작용에 대해서는 나와 생각과 감정이 하나의 덩어리, 하나의 우리처럼 이해된다. 몸과 마음이 곧 나라는 전제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익숙한 전제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균열이 보인다. 나라는 존재는 정말 몸과 생각과 감정일까. 사실 나라는 것은 어떤 이름이나 신체 부위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몸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신작용을 순식간에 알아차리는 무엇이다. 내가 길을 걷다 행인을 알아보듯, 나는 몸에서 배고픔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린다. 위와 장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혈당이 떨어지는 생리적 과정은 나에게 관찰되는 대상이지, 그것 자체가 내가 아니다.

발이 넘어져 다치면 신경계는 통증 신호를 뇌로 전달한다. 그러나 신경세포나 발의 세포는 스스로 아프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기능할 뿐이다.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Knower) 따로 있다. 바로 나다. 몸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마치 귀신같은 존재이다. 신체는 고장 나고 회복되며 자동적으로 작동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알아차리는 무형의 무엇이 곁에 있다. 바로 나다.

이 구조는 일상의 모든 장면에서 반복된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펼쳐지는 영상을 본다. 그러나 텔레비전 기구나 전파는 자신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비가 내리는 것을 안다. 그러나 빗방울과 구름은 자신이 떨어지고 흩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심장은 자신이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박동할 뿐이다.

이 모든 예를 종합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나라는 존재는 모든 현상과 관계와 물질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나의 몸과 정신작용을 포함하여, 그저 존재하고 기능하고 흘러갈 뿐이다.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몸과 마음의 모든 활동을 조정하는 뇌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기계처럼 작동한다. 오직 나라는 의식만이 이 모든 것을 거울을 비추듯 알아차린다.

그래서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까지 나라고 여겨온 몸과 마음을, 정말로 나와 분리해서 관찰할 수 있는가. 생각과 감정, 기억과 꿈, 욕망과 두려움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 나에게 나타나는 대상임을 자각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나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 의식이며, 몸과 마음은 관찰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나라고 믿어왔던 인간은 하나의 정교한 로봇에 가깝다. 이 인간 로봇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프로그램된 반응의 연속일 뿐이다. 그리고 나라는 의식은 이 인간 로봇을 따라다니며, 마치 구름으로 된 소파에 앉아 그 움직임을 관찰한다. 몸은 텔레비전이고, 마음은 그 화면에 펼쳐지는 영상이며, 나는 그 입체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관객이다.

빛으로 투사된 입체 영화 속 등장인물은 울고 웃고 절망하지만, 그 인물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관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라는 알아차리는 의식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 로봇의 모든 활동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지켜보고 있는 무엇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순수의식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영혼이라 부른다.

장자가 현실을 꿈이라 했고,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가 현실을 낮에 꾸는 꿈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라는 입체 영화에 너무 깊이 동일시된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은유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순수의식이든 영혼이든, 귀신같은 의식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이 본질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분명히 수용하는 일이다.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된다. 내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나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 자체가, 어떤 역할도 어떤 형상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비추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