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인간, 그리고 중간자로서의 기억

by 임풍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겹쳐 있다. 우리가 빅뱅을 말하고, 별과 원소의 기원을 묻는 순간, 그 질문의 바닥에는 늘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전제되어 있다. 우주와 인간은 분리된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인식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다른 행성에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지구의 인간이 바로 우주인이다.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은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거주하지만, 우주의 흐름 한가운데에서 기억하고, 질문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특이한 존재이다.

우주와 별, 그리고 인간 사이의 연관성은 상징 이전에 물질적으로 매우 직접적이다. 인간은 별과 같은 원소와 광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몸은 산소, 탄소, 수소, 질소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칼슘, 인, 칼륨, 나트륨, 마그네슘, 철 같은 무기질은 양은 적지만 생명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인 몸속 무기질의 총량은 약 3kg으로 체중의 약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비율이 사라지는 순간 생명은 즉시 기능을 잃는다. 몸속 무기질은 광산에서 채굴되는 광물과 동일한 원소이지만, 자연의 결정 구조 그대로가 아니라 생명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체되고 재배열된 상태이다.

이 점에서 인간의 몸은 문자 그대로 별의 구성 성분인 돌과 금속이 살아 있는 질서로 재배열된 상태이다. 광물과 생명은 전혀 다른 범주가 아니라, 배열과 안정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러한 원소들은 태양과 별 내부의 핵융합, 그리고 초신성 폭발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한다. 별이 죽은 뒤 우주에 흩어진 물질이 모여 지구를 이루었고, 그 바탕 위에서 생명이 출현했다. 인간의 몸은 기능적으로도, 기원적으로도 살아 있는 별의 기억을 담은 작은 우주라고 볼 수 있다. 동양 철학에서 인간을 소우주라고 여겼던 지혜와도 연결된다.

138억 년 전 우주의 탄생 시점으로 추측되는 빅뱅은 흔히 폭발이라는 이미지로 오해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공간 안에서 무언가가 터진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에너지와 물리 법칙이 동시에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경계였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초기 우주는 빛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쿼크와 전자, 광자는 아직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장(field) 적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우주가 팽창하며 식어가자 대칭이 깨졌고, 하나였던 장은 서로 다른 얼굴로 분리되었다. 대칭이 깨졌다는 뜻은 원래 하나로 구분되지 않던 힘과 입자들이 우주가 식어가면서 서로 다른 성질로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법칙이 바뀐 것이 아니라, 원래 정보의 장에 담긴 가능한 여러 상태 중 하나가 선택되면서, 차이, 구조, 물질이 생길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물질과 빛이 분리되었고, 우주는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을 이해해도 결국 한 질문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질문 앞에서 과학은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에너지는 어떤 더 근본적인 물질의 부산물이 아니라, 변화와 대칭이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로 표현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장은 무언가로 채워진 실체가 아니라, 공간이 가질 수 있는 성질이다. 즉 진공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에너지 준위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하는 상태이다. 진공과 암흑에너지는 공간이 존재하면 이미 에너지 밀도 현상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따라서 에너지는 부분적으로 공간이 가진 성질로 볼 수 있고, 장(field)은 그런 에너지의 특성을 보인다. 에너지는 물질 이전에 공간과 장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표현이다.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라고 생각했던 상태가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유라는 물질 구조와 차이를 잠시 허용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불교의 반야심경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단순한 철학적 은유를 넘어선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색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이 맞을 때 잠시 안정된 진동의 상태다. 그리고 공은 허무가 아니라, 그러한 진동을 가능하게 하는 청사진을 담고 있는 바탕이다. 현대 물리학의 장과 진공 개념은, 이 오래된 불교의 통찰과 구조적으로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물질은 공의 표현이고, 공은 언제나 물질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핵심은 인간 인식의 위치다. 인간은 이 빠른 우주적 진동의 결과물 속에 살고 있다. 원자와 분자, 신경과 사고까지 실제로는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고 있지만, 모두 매우 안정된 패턴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정지된 실체로 착각한다. 마치 초고속으로 달리는 기차 안이나 빠르게 공전과 자전을 하는 지구 표면에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주의 속도를 체감하지 못한다. 그 결과 세계를 고정된 사물로, 자신을 변하지 않는 자아로 인식한다. 이러한 고정감 인식은 생존에는 유리하지만, 세계의 과정성과 유동성을 가리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착각 위에서 138억 년이라는 시간도 등장한다. 이 수치는 틀린 값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관측자가 선택한 기준에서 계산된 좌표다. 그러나 우주 자체의 관점에서는 시작과 끝, 빠름과 느림, 팽창과 정지가 하나의 상태일 수 있다. 시간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가장 신비로운 장면은 여기서 나타난다. 인간은 철과 탄소, 칼슘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원소들이 모여 형성된 생체 구조다. 그런데 이 철로 이루어진 존재가, 전통적으로 자신을 구성한 원소의 기원을 사모하고, 별과 빛과 하늘을 신으로 형상화해 숭배해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라, 자기 기원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인간은 우주의 부산물이면서 동시에, 우주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창구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중간자다. 완전한 무도 아니고, 완전한 유도 아니다. 공과 색 사이, 장과 물질 사이, 정보와 형상 사이에 서 있는 존재다. 인간의 의식은 우주 전체의 진동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그 흔적을 사유와 상징, 신화와 과학이라는 방식으로 추적해 왔다. 표현은 달라도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문학은 우주의 운동을 '굉음'으로 표현해 왔고, 바그너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와 마주할 때 내부에서 울리는 존재의 진동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바그너의 음악은 지금도 "별의 소리처럼 들린다"라고 평가된다.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성과 소멸의 춤을 추고 있다. 빅뱅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입자와 모든 생각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과정이다. 인간은 그 춤의 한 박자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그 리듬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단순하다: 인간은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우주적 과정의 한 표현이다. 그리고 기억이란 과거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우주가 자기 자신을 잊지 않으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철과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다시 철과 빛의 근원을 묻고 있다는 이 장면 자체가, 우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